여행의 기쁨은 어디서 오는가?

태국 방콕 여행 - 3일 차

by 노용기

여행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


여행을 시작할 때는 욕심부리지 말자고 다짐한다. 여행을 하면서 여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기억이 남는 것이 꼭 화려한 건물들과 멋진 자연 풍광만은 아니다. 때로는 여행 책자에는 나오지 않는 골목길을 거닐며 보았던 작은 꽃 한 송이가 기억 남을 때가 있다. 그리고 길가다 우연히 만난 현지인과 차 한잔 하며 대화를 나누었을 때가 전체 여행 중에 가장 좋은 추억으로 간직될 때도 있다.


대학생 시절 유럽을 여행한 적이 있다. 지금보다 혈기 왕성할 때라 해뜨기 전부터 별이 반짝이는 늦은 밤까지 유럽 도시 구석구석을 걸어서 여행할 때였다. 그렇게 한 달 넘게 여행하다 보니 어느새 여행이 아닌 고행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한 기차역에서 아들을 어깨에 목마 태우고 기차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는 한 독일인 남성과 대화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의사로 일하고 있으며, 예전에 한국의 한 병원에서 인턴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그는 이 것도 인연인데 시간이 되면 차 한 잔 하지 않겠냐고 제안하였다.


그와 나는 기차표 구입을 마치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나에게 따뜻한 코코아 한 잔과 베이글 하나를 사주었다. 나는 코코아를 마시며 그와 아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마치 외국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아빠와 아이 사이가 정말 친구같이 가깝게 느껴졌다. 그는 아이의 별명이 스피드라고 했다. 자동차를 좋아해서 그런 별명을 붙였고, 아이도 그 별명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그중에 기억나는 것은 그가 지금 육아를 위해 3개월 휴직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아내 역시 의사인데, 둘이 번갈아 가며 3개월씩 휴직을 하며 육아와 가사를 도맡아 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활짝 웃으며 “참 좋으시겠네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사실 마음으로는 그렇게 큰 감흥은 없었다. 원래 독일에서 의사들은 3개월에 한 번씩 쉴 수 있나 보군 하며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이다. 나에게 인상 깊었던 것은 그의 친절과 한국과의 인연 그리고 아빠와 아들 간의 사이가 참 좋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나 역시 육아 휴직을 고민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이 바로 그가 누렸던 휴직 제도였다. 어쩌면 기억에서 지워질 수도 있었던 그와의 짧은 대화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의미 없는 만남과 경험이란 없는 것 같다.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경험한 사건들이 알게 모르게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이는 여행지에서 짧은 인연을 한 번이라도 만들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잠시 스치는 인연이라도 무심코 넘기지 말고 소중하게 여겨야 할 필요가 있다.


IMG_4613[1].JPG 호텔에서 바라 본 방콕



여행에서 한 번쯤 꼭 해 봐야 할 것


아침에 일어나 쌀 죽을 먹었다. 몸이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는데 여전히 안심할 수는 없어서이다. 조식 뷔페를 포기하고 숙소에 우두커니 앉아 TV를 보며 흰죽을 먹었다. 장인어른께서는 밤 새 화장실을 여러 번 들락거리셨다고 한다. 그래서 죽조차 드시지 못하고 방안에 누워만 계신다.


시간이 한 참 흘러 장모님과 아내 그리고 아이들이 아침을 먹고 숙소로 올라왔다. 오늘은 몸 상태를 보아하니 밖으로 나가 여행하기는 글러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호텔 야외 수영장으로 향했다. 아침이라 그런지 수영장은 매우 한산했다. 우리나라였다면 40~50명은 족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수영장에 나와 아이들만 있다. 이 여유로움이란…….


수영장에 배영 자세로 누우니 물소리와 바람소리만 귓가에 들린다. 방콕에 도착해서 처음 느껴보는 고요함이다. 도시에서는 소음 때문에 마음을 평안하게 가라 앉히기가 쉽지 않다. 도심 한가운데서 자동차 경적 소리와 각종 소음에 노출될 때면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한다. 그럴 때면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으로 숨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런데 지금은 방콕이라는 도시 한가운데서도 이러한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니 저절로 행복감 몰려온다. 뿐만 아니라 햇볕도 적당히 따사롭고 바람도살랑 살랑 불어 기분까지 상쾌하다.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수영을 하고 살짝 추위가 느껴질 때면, 핀란드 식으로 지어진 사우나에 들어가 몸을 녹였다. 뜨겁게 달궈진 돌에 물을 살짝살짝 부으니 찌지직 소리를 내며 모락모락 김이 올라온다. 사우나 안 온도가 올라가며 온 몸에 땀이 조금씩 흐르기 시작한다. 네 살짜리 아들은 뜨거운 사우나 열기에 밖으로 도망쳐 나갈 만도 한데, 내 옆에 꼭 붙어 사우나를 제대로 즐기고 있다. 땀을 통해 몸속 노폐물이 빠져나가는 느낌에 몸과 마음이 모두 깨끗해지는 것 같다.


나는 이런 여유로움이 좋다. 여유가 생기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사실 행복은 별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걱정 근심 없이 마음 편안 것만큼 행복한 게 있을까 싶다. 그리고 마음이 차분 해 지면 생각이 또렷해진다. 스트레스라는 것이 결국 인생의 문제들이 얽히고설켜서 머리를 복잡하게 하기 때문에 생긴다. 그런데 마음속 먼지들이 가라앉으면 삶의 문제들이 명확히 보이고 나아가야 할 방향도 뚜렷하게 보인다. 그래서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도 좋지만, 여행 중 하루 정도는 이렇게 고요한 가운데 내 삶을 바라보는 시간을 같은 것도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IMG_5120[1].JPG 호텔 수영장




여행의 기쁨은 어디서 오는가?


오전까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장인어른도 약을 드시고 조금씩 기력을 회복 해 가고 있으시다. 식사도 쌀죽에서 밥으로 바꾸어가며 하실 수 있게 되었다. 하루 종일 여유롭게 호텔 수영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수영하고 선베드에 누워 책도 보고 낮잠도 즐기던 사이 어느덧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 되었다. 아내는 장인어른을 생각하여 외식보다는 집에서 요리를 해서 먹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나와 아내는 잠시 호텔을 나와 근처 쇼핑몰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열대과일과 뼈 없는 닭다리, 스파게티 재료 그리고 간식거리를 샀다. 숙소에 도착 후 나는 팔을 걷어 부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우선 뼈 없는 닭다리를 오븐에 넣고 구웠다. 그 사이 냄비에는 스파게티 면을 끓이고, 프라이팬에는 각종 야채와 해산물을 올리브 오일에 볶았다. 닭다리가 어느 정도 익어갈 즈음 나는 아이들을 위해 가져온 주먹밥 재료들을 닭다리 위에 뿌렸다. 김 가루와 맛을 내기 위한 형형색색의 가루들이 닭다리와 한데 어우러졌다. 없는 재료로 나름 창의성을 발휘한 것이다. 요리가 완성되자 가족들은 내가 한 요리가 맛있다며 만족 해 했다. 장인 장모님도 앞으로는 밖에서 사 먹지 말고 이렇게 집에서 해 먹자고 하셨다. 아이들도 아직 적응이 안된 태국 음식보다는 내 음식을 훨씬 좋아했다. 대단한 요리는 아니었지만 육아휴직을 하며 틈틈이 요리를 한 것이 오늘 약간 빛을 발한 것 같았다.


저녁을 마치고 아내가 근처 호텔 재즈바에 가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장염이 모두 나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재즈바에 가면 아무래도 술을 한 잔이라도 시켜야 할 텐데, 아직 술을 마시기엔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잠시 저녁 식재료를 사기 위해 쇼핑몰에 갔다 온 것 외에는 하루의 대부분을 호텔에서 보냈다. 어떤 특별한 관광지에는 가지 않았지만, 오늘처럼 아이들과 함께 수영장에서 물놀이하고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해 먹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장인 장모님과 아이들이 좋아하니까 나 역시 기분이 좋다. 남은 여행에서도 우리 가족 모두가 오늘처럼 행복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IMG_4775[1].JPG 스파게티와 닭 다리 오븐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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