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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텔 Oct 28. 2020

무례에서 비롯된 다이어트와 아메리카노

2W MAGAZINE Vol.2

*본 글은 1인 전자책 출판사 아미가에서 매달 발행하는 웹진 2W MAGAZINE 8월호에 

실린 에세이입니다. 알라딘, 예스24, 교보문고, 리디북스에서 1,000원에 판매되고 있으며 보다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께선 구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커피를 처음 마셔본 게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20살 근처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 별다방(스타벅스)도 그 즈음에 처음 알았다. 별다방이 이대 앞에 1호점을 열었을 때가 1999년이고 내가 21, 22살 때면 2007년이다. 별다방이 한국에 자리 잡은 지 8년 정도 됐을 때다. 지금은 청소년이고 성인이고 할 것 없이 다들 카페에서 공부하거나 일하는 게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내가 학생일 때는 미성년자들이 카페에서 친구와 만나거나 공부를 하는 게 보편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20살이 넘어서야 카페를 처음 가봤다는 사실이 딱히 놀랄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친구와 함께 나는 별다방을 처음 방문해봤고 뭘 주문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동행한 친구는 내 입맛에 맞을 거라며 카라멜 마끼야또를 추천했다. 음료 이름이 독특하고 예쁘다고 생각했다. 발음하는 내 목소리가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주문해 마셔본 마끼야또는 신세계를 경험한 기분이었다. 처음 한 모금은 쌉쌀했는데 뒤로 갈수록 달고 부드러운 이 음료는 한동안 내 원픽이었다. 한창 달콤한 걸 좋아하던 때였고 그 중에서도 초콜렛은 앉은 자리에서 몇 개씩 까먹을 정도로 달디단 간식을 즐겨먹었다. 그렇게 마끼야또를 처음 마시게 된 이후로 카페를 갈 때마다 온갖 달콤한 음료는 종류별로 하나씩 주문해서 마셔봤다. 마끼야또, 바닐라라떼, 민트초코, 화이트모카 등등등...

별다방에서는 모든 음료에 다양한 시럽과 휘핑크림 등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마끼야또에 휘핑크림을 추가해서 마시기 시작했다. 내 입맛을 고려해 마끼야또를 추천해준 친구는 맞은편에 앉아 아메리카노만 들이키면서 극강의 단 음료를 잘도 마시는 나를 질린 눈으로 보거나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당시 일상이었다.(자기가 추천해 줘 놓고선?) 나는 나대로 음료 색상부터 맛이 없어 보이는 아메리카노를 맛있다고 마시는 친구가 신기했다. 서로의 음료를 한 입 씩 마셔보고는 각자 상대방을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놀라곤 했다. 그러던 나였지만 지금은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신다. 휘핑크림을 추가한 마끼야또에서 아메리카노로 입맛이 변하게 된 데에는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부터 할 이야기다.

 

좋아하던 달콤한 음료들을 안 마시게 된 건 반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헬스PT를 받기 시작했고 담당 트레이너로부터 음료는 아메리카노 말고는 다른 건 마시지 말라는 청천벽력같은 미션이 떨어진 것이다. PT를 시작하자고 마음 먹은 일 역시 반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당시 사귀던 애인이 있었다. 애인 그리고 애인의 친구들과 가끔 만나서 놀았고 작은 사건이 있던 그 날도 애인과 나, 그리고 그의 친구 두어 명 정도가 함께 만나 밥을 먹고 카페에 있었다. 이런 저런 신변잡기를 나누다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가 말이 없어지던 순간, 각자 핸드폰을 확인하던 그 순간에 내 옆에 앉아있던 친구1은 나에게 본인이 요즘 즐겨보는 웹툰을 소개해주겠다며 핸드폰 화면을 보여줬다. 그 때 당시 한창 연재 중이던 인기 웹툰이었고 큰 줄거리는 먹는 걸 좋아하는 고도 비만 여성이 운동과 식이를 통해 체중감량을 시작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웹툰을 소개해준다는 명목으로 나에게 어떤 메세지를 건넨 것이다. 웹툰을 추천한다고 말하는 그 행간에는 ‘너도 이걸 보고 주인공처럼 다이어트를 좀 해야 하지 않겠니.’ 가 숨겨져 있었다. 내가 너무 비약하는 것 같은가? 여성들은, 특히 평균 체중 이상을 웃도는 여성들은 자신에게 날라오는 언어적, 비언어적 메세지를 굉장히 민감하고 예리하게 포착한다. 같은 말이어도 상대방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커다란 몸을 가지고 살다 보면 이런 쪽으로 능력이 발달할 수 밖에 없다. 늘 눈치를 봐야 했고 분위기를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내게 재밌는 웹툰을 추천해준다는 그의 메세지는 명확했다. 그의 눈빛, 표정, 말투 모든 것이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나한테 ‘너 운동 좀 해.’ 혹은 ‘너도 주인공처럼 살 좀 빼야 할 것 같은데.’ 하고 말하고 있었다. 애인은 키가 나랑 비슷했다. 여성과 남성이 키가 비슷하면 나란히 섰을 때 희한하게 여성이 좀 더 커 보이는 착시효과가 있다. 그런데 나는 실제로도 애인보다 덩치가 컸고 키는 비슷했다. 애인과 같이 있으면 확연히 보였다. 내 커다란 몸이. 그 친구도 당연히 그 사실이 눈에 아주 잘 보였을 것이다. 사실이라고 해서 있는 그대로 전달해도 되는 것인가. 답은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아니오’다. 그 사실이 당사자에게 상처가 되는지 아닌지는 말을 건네는 본인도 알고 있다. 그는 내 애인의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한테 상처를 줘가면서까지 충고를 빙자한 오지랖을 떨어도 되는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이걸 몰랐고 멍한 표정으로 그 애 한테 아무 말도 못 한 채 집에 돌아가는 내내 홀로 뒤늦은 분노와 수치를 삼켰다. 눈물마저 핑 돌았다.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믿을 수 없었고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다.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바로 그 다음주에 헬스장을 찾아가서 PT를 등록했다. 운동과 담을 쌓고 살다가 처음 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그 순간의 기억은 100번 생각해도 100번 열 받는 기억이다. 내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살이 찐 여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수치심, 분노, 모욕감 같은 온갖가지 감정을 홀로 감내해야 했다.


정작 애인은 그 날 그 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나와 그 애 사이에 뭐가 오고 갔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갑작스레 헬스장을 등록하는 여자친구의 심기 변화가 기꺼웠을 뿐이었다. 심지어 기왕 하는 거 확실하게 하라며 비용도 일부 보태줬다. 고마워해야 하는지 어이없어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는 분노로 차 있는데 애인은 신나하고 있었다.(이 샛기, 혹시 나한테 대신 말 좀 해보라고 지 친구랑 짜기라도 했던 걸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지금와서 든다.) 그렇게 시작한 PT였다. 그리고 트레이너로부터 커피는 아메리카노 외에는 마시지 말라는 미션을 받았다. 확고한 체중감량이 목표였으므로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눈 앞이 캄캄해졌지만 이걸 왜 시작 했는지를 떠올리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어디 커피 뿐이던가. 초콜렛을 비롯해 칼로리가 차고 넘치는 모든 간식은 당분간 자제해야 했고 탄수화물도 줄여야 했으며 단백질을 보충해야 하니 되도록이면 삶은 닭가슴살과 초록초록한 채소들로 도시락을 싸서 다니라는 말에 그렇게 했다.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죽기 살기로 다이어트를 했고 체중 감량에 성공했다. 시간과 비용을 아낌없이 투자했고 투자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즐겁지는 않았다. 애초에 시작하게 된 계기가 온전히 나를 위함이 아니었고 먹는 즐거움이 세상사는 즐거움의 절반이었던 나에게 이 시기는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운동을 하지 않는 지금까지도 커피는 아메리카노를 주로 마시게 됐다. 마끼야또에 휘핑크림을 얹어 마시던 패기는 전부 죽었다. 이제 마끼야또는 반 잔도 못 마신다. 분노와 수치심으로 시작해 결실을 맺었던 내 몸은 현재 요요로 다시 커다래졌고 그 때 사귀던 애인과는 헤어진 지 오래이다. 그는 내 친구가 아니라 애인의 친구였지만 애인보다도 깊게 뇌리에 박혔고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X놈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고마운 점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아메리카노를 즐길 줄 알게 됐고 좋은 작품을 그려내는 작가님을 알게 됐으니까 이 점은 개미 눈물만큼은 감사한다. 나는 은혜를 모르는 인간은 아니다. 다만 은혜도 원수도 아주 오래오래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아마 지금의 나라면 모욕감을 가지고 헬스를 등록하는 게 아니라 시끄럽고 너나 잘 하라며 마시던 음료를 그 면상에 뿌렸을 것이다. 분노를 바로 그 자리에서 표현하는데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조언이라는 탈을 쓴 오지랖을 항상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타인에게 어떤 간섭을 하고 싶어질 때 한 번 더 생각해보자. 무엇을 위한 간섭이고 조언인지. 정말 상대방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 시혜적인 태도로 상대방을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냥 비난하고 싶은 건 아닌지. 

가끔 한 번씩 그 애를 떠올릴 때마다 드는 생각은 한결 같다. 진짜 개 같은 자식이다. 요즘도 그렇게 무례한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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