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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뫼 Oct 06. 2019

두려움과 마주할 용기

며칠을 자연이를 재우며 나도 같이 잠이 들어버렸다. 아침까지 계속 잔 적도 있었고, 새벽에 부스스 일어나 치우지 못한 거실의 장난감들을 치우고 다시 잠이 들기도 했다. 오늘도 역시나 눈을 뜨니 새벽 2시. 거실의 장난감을 정리하고 딸의 한복을 다렸다. 내일 어린이집에서 예절 교육과 송편 만들기가 있다고 하여 어제 부랴부랴 주문한 새 한복이었다. 길이가 길어 치마의 어깨끈을 실로 꿰매고, 저고리의 소매도 잘 접어 반듯하게 다렸다.


구겨진 아이의 한복을 다리며 다리미질하는 나를 생각했다. 어차피 짧은 시간 입을, 아이가 입고 활동하면 쉽게 구겨질 한복을 나는 왜 굳이 다리는 걸까. 아이가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아이로 보이길 바라는 마음과 세심한 엄마로 비치길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타인의 눈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존재한다. 나 스스로 섬세하고 디테일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이다.

 

그렇다면 나는 디테일한 사람인가, 생각하면 그런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사람이 모든 면에서 디테일한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나의 문제는 한 영역에서도 오락가락한다는 점이다.


편집자 시절 나는 이 문제 때문에 꽤 고생을 했다. 처음 교정을 볼 때는 꼼꼼하게 나름의 편집 원칙을 정해두고 일을 시작한다. 그런데 교정을 진행하면 원칙들이 추가되거나 심지어 바뀌는 일도 생긴다. 평소 나는 꼼꼼한 사람이라 자부하지만, 이런 순간이 오면 나는 흔들리고 만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원칙을 반영하는 일이 나에게는 상당히 괴로웠다. 괴로움은 집중력을 흩트리게 했고, 반영하지 못한 원칙은 다음 교정지에 여실히 드러났다.


생각해 보면 나는 디테일하기보다는 완벽주의자 성향이 강했다. 디테일해야 하는 부분은 처음부터 눈에 확 띄지 않는다.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여러 번 살펴야 눈에 들어오는데 나는 원고를 단번에 장악하기를 바랐다. 그래야 능력 있는 편집자인 줄 알았다. 내가 무슨 출판에 잔뼈 익은 편집자라고 다듬어지지 않은 날 원고를 보고 단번에 파악하기를 바랐을까.


솔직히 나는 다시 편집자로 돌아가는 일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이런 부분에서 일 것이다. 다시 돌아가면 나의 이런 문제들을 다시 마주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다. 일을 하지 않으면 부딪히지 않을 문제. 나는 “직장 생활을 하는 나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그것은 나의 문제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딪히지 않는 것이 나에게, 앞으로 65년을 더 살아갈 수도 있는 나에게 좋은 일일까. 내 인생에게 온당한 선택일까.


내가 좋아하는 한 작가는 35살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딱 지금의 내 나이다. 나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내가 일하는 것이 가계에 큰 도움이 될 것이고, 더 이상 시간을 미뤄두기에는 세상 현실이 녹록지 않을 것이다. 내 두려움을 마주하고 용기를 내는 것이 몇 달 남지 않은 올해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 내 삶의 태도인 것 같다.



※ 약 4주 만에 이어 쓰는 게으른 자신을 돌아보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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