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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뫼 Jan 03. 2020

믿는 우리

자연이가 감기에 심하게 걸려 소아과에 갔다. 자연이가 태어난 지 6개월이 지났을 때 처음 그 소아과에 갔으니 1년 반 정도 같은 병원의 같은 선생님께 진료를 받고 있다. 원래 병원에서 좀처럼 울지 않는 자연이인데, 한 번은 선생님이 귀지를 파주다 핀셋이 귀에 살짝 닿았는지 그때부터 선생님이 귀를 건드리기만 해도 자연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도 선생님이 귀 속을 보려고 하니 자연이는 지레 울기부터 했다. 달래가며 겨우 진료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선생님이 물었다.      


“자연이 엄마 껌딱지죠?”     


나는 애가 왜 그러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눈썹은 약간 울상이지만 입은 웃고 있는) 표정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보통 ‘엄마 껌딱지’인 아이들의 엄마들도 이런 얘기에 나와 같은 표정을 짓는 경우를 많이 봤는데, 다들 엄마인 자신을 좋아해주니 어쨌든 좋다는 마음 반, 하지만 조금은 지친다는 마음 반으로 그런 표정을 짓지 않을까 싶다.      


책이나 주변에서는 엄마 껌딱지는 그냥 그 또래 아이들의 당연한 행동으로 얘기하고, 나도 그래서 조금은 힘들지만 으레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소아과 선생님은 내가 처음 듣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야 엄마를 믿어요. 괜찮아요.”     


아…!      


이 말은 내가 만약 ‘2019 올해의 한 마디’를 선정한다면 이 말을 꼽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에게 큰 깨달음과 충격을 주었다. 엄마 껌딱지를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그걸 왜 당연하다고 말하는지 진짜 이유를 알게 되어서 안도할 수 있었고, 내가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존재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웠다.      


그리고 짧은 순간 10대가 된 자연이와 나의 모습이 그려진 것 같기도 했다. 자연이가 이 시간을 잘 만들어 가면 지금보다 더 커서도 나를 믿겠구나, 나 또한 자연이를 절대적으로 믿어주는 존재가 되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다짐했다.           


며칠 뒤, 온 가족이 감기에 시달려 병원을 찾았다. 일요일에 문 연 병원을 찾느라 그 소아과는 가지 못했다. 그렇게 ‘민자연 가족’ 셋은 쪼르륵 진료를 받았다. 이번에도 자연이는 선생님이 귀를 들여다보려고 하자마자 또 울고 말았다. 어린아이가 겪은 나름의 트라우마는 쉽게 없어질 것 같지 않았다. 첫 번째로 자연이가 진료를 받고 남편의 차례가 되자 나는 자연이를 안고 조금 떨어져 지켜봤다. 내가 자연이에게 “봐, 아빠는 울지 않지요?” 하니까 “응응!” 하고 반응을 해,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남편도 내 마음을 읽었는지 내가 진료를 받을 땐 남편이 “엄마도 울지 않지요?”라고 해주었다. 그러자 자연이는 신기하단 듯한 반응을 보였다.      


주말이 지나고 자연이와 나는 원래 다니던 소아과를 찾았다.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 나는 아이에게 “자연아, 그때 엄마랑 아빠는 안 울었지? 오늘 자연이도 울지 않아볼까? 선생님이 아프게 하는 게 아니야”라고 달래며 주말의 일을 상기시켜 주었다. 나는 자연이가 울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선생님이 귀 안을 살피려 하자 자연이는 조금 움찔했다. 나는 급히 자연이에게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자연이는 더 이상 움찔하거나 울지 않았고, 무사히 진료실을 나올 수 있었다. “오늘 자연이 안 울었네” 하니 자기도 신기한지 아이는 격하게 “어어!”라고 말했다. 자연이가 한 뼘 더 성장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 대견하고 예뻤다. 아이가 부모의 모습과 말을 보고 들으며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자연이의 용기에 난 큰 감동을 받았다.       


유아기가 지나고 엄마 껌딱지 시절이 끝난다고 해서 ‘엄마에 대한 신뢰 100프로! 이제 완성되었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뢰는 어떤 도달점에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생각하는 모양으로 계속해서 다듬어가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둘은 서로 큰 경험을 했다. 힘겹게 쌓은 이 사랑스러운 경험의 벽이 차곡차곡 쌓여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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