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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뫼 Feb 01. 2020

‘혹시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의 가변적 요인.     


‘변수’에 대한 사전적 정의다. 한 사람의 인생에 변수는 얼마나 자주 등장할까. 뉴스에 나올 법한 사건‧사고를 겪은 사람이라면 예상치 못한 ‘변수’에 인생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 그런 변수를 겪은 적이 없다. 내 뜻대로, 내 계획대로 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예상치 못한 변수에 인생이 무너져 내린 적은 없다. 무척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난 사실 일상에서 너무나 많은 변수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어온다. 나의 이 ‘혹시나 병’의 대표적 사례는 바로 가방이다.


나에게는 세 가지의 가방이 있다. 마트나 병원 등 집 근처 볼일을 보러 다닐 때 가지고 다니는 에코백. 시내 약속이 있을 때 들고나가는 약간의 직장인 스타일 숄더백. 마지막으로 자연이와 외출할 때 기저귀, 식판 등을 넣고 다니는 (아주아주 큰) 잔스포츠 백팩.      


이 세 가방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은? 1. 일반 물티슈(언제든 끈적이는 것들을 닦을 수 있게) 2. 손소독 알코올 물티슈(손가락을 빠는 자연이 손을 언제든 소독할 수 있게) 3. 여러 개의 연필과 볼펜(언제든 메모를 할 수 있게) 4. 접이식 장바구니(언제든 장을 볼 수 있게) 5. 하리보 젤리(언제든 입이 심심하지 않게).     

 

이 다섯 개의 목록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한 가방에만 들어 있다가 가방을 바꿔 들 때마다 옮기는 것이 귀찮아 ‘나 편하자고’ 두 번째 가방에도 넣었다. 편의상 두 가방에 넣어뒀던 이 물품들이 세 번째 가방에 자리 잡을 때에는 성격이 급작스럽게 바뀐다. ‘혹시나’라는 병명이 붙은 채. 특히 볼펜과 연필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개수가 불어나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넣어두었던 이 물품들은 여러 가방에 나뉘어 들어간 만큼 사용 빈도가 높지 않다. 하지만 언제 쓰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없으면 무척 아쉬울 거란 생각에 쉽게 뺄 수가 없다. 그리고 필요한 순간이 생기면 그 순간만큼은 정말 편하고 만족스럽다. 그 물품들이 내 가방 안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킨다.      


20대 때, 나는 어디를 가나 한 가방만 메고 다녔는데 그때 역시 ‘혹시나 병’을 앓았다. 그날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가방 안에 다 넣고 다녔다. 다이어리를 시작으로 텀블러, 립 제품만 세 가지 이상이 든 파우치, 책 1~2권, 주간지, 필통, 각종 적립 카드가 든 벽돌 같은 지갑 등. 무게를 재보지는 않았지만 한쪽 어깨로 들기엔 상당한 무게였다. 그렇게 몇 년을 오른쪽 어깨로만 메고 다니다 허리에 무리가 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적도 있었다.      


단출한 외출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도 신용카드와 휴대전화만 주머니에 넣고 간편하게 집을 나서고 싶은 마음에 몇 번 해본 적이 있다. 어깨에 가방이 없으니 걸으며 어깨와 허리 스트레칭도 할 수 있어 산책하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손이야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씻으면 되었고, 메모야 갤럭시 노트 유저답게 휴대전화를 활용하면 되었고, 마트에서는 500원짜리 재활용 봉투를 구매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갈 곳 잃은 신용카드였다. 처음에는 신용카드가 없어진 것도 몰랐다. 며칠이 지나서야 카드가 어디에도 없다는 걸 깨닫는다. 지갑에 넣고 나갔으면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있을 나의 카드. 세 번쯤 재발급을 받고는 단출한 외출을 시도하지 않았다.      


나는 안다. 이 ‘혹시나’ 하는 생각이 머리가 아닌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내 불안한 마음이 그 물건들을 챙기라고 말한다. 아마도 내가 크게 변하지 않는 한, 시간이 지나며 내 가방 속 붙박이 물건들은 똑같은 과정을 거치며 바뀌어 갈 것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이 붙박이 물건들이 내 인생을 바꿀 변수 따위는 되지 못한다. 그저 아주 짧은 순간 내 기분을 스스로 통제하는 것 정도의 역할을 할 것이다.      


나는 이런 내가 불편하기도, 때로는 편하기도 하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나보다 더 편한 사람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아직은 지금의 나를 그냥 두기로 한다. 내가 편한 쪽으로 생각하면 그만일 테니. 그 물건들 덕분에 나는 때때로 기분이 꽤 괜찮아진다.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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