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점뫼 Feb 07. 2020

나의 손이여 바빠져라

가족이 아닌 나를 위해!


이번 주 오후는 내내 바빴다. 집안 청소를 하고 장을 봐 와 저녁 반찬을 만들었다. 꽈리고추소고기장조림, 깻잎찜, 가자미미역국, 콩나물국, 부대볶음, 카레 등이 이번 주 우리 집 저녁 식탁에 올랐다. 평일 저녁에 배달 음식을 먹는 건 왠지 주부로서 직무유기인 것 같아 되도록 직접 만들려고 하는데, 이번 주는 분주히 움직인 덕분에 적어도 하루에 한두 가지의 새 반찬을 먹을 수 있었다. 직접 만든 반찬으로 채워진 식탁을 보면 (맛을 떠나) 꽤 뿌듯해진다.     


오늘은 엄마의 대보름 나물이 있어 저녁밥 걱정을 하지 않고 오전에 청소와 빨래를 마쳤다. 그러고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씻으면서도 너무 뜨거운 물은 피부에 안 좋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뜨거운 물로 씻어야 씻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습관 때문에 수도꼭지 레버는 좀처럼 파란 쪽으로 내려가지를 못했다.

     

집안일과 개인 정비(남편에게 배운 말로 군대에서 썼다고 한다)까지 마치자 여유가 찾아왔다. 집 아래 카페에서 커피를 사와 식탁에 앉아 책을 펼치다 문득 손등이 무척 건조하다는 걸 느꼈다. 서랍에서 크림을 꺼내 손 구석구석에 펴 발랐다. 너무 기름지지 않고 적당히 촉촉하고 보드라운 느낌이 좋았다. 자연이가 손톱에 붙여준 분홍색 체리 스티커가 잘 어울려 보였다.          




언니는 내 손을 보고 ‘두꺼비 손’이라고 불렀다. 내 손이 귀여워서 그렇게 불렀다고 하지만 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작고 야리야리한 언니 손에 비해 내 손은 투박하고 마디도 굵은 편이어서 여자 손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이를 낳고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손을 더 거칠어졌다. 확실히 아이를 낳기 전보다 손에 물을 묻힐 일이 많았다. 흘린 침을 닦이랴 가제 손수건도 수없이 빨아야 했고, 아이가 사방팔방 흘린 음식을 닦기 위해 행주와 걸레도 빨고 짜기를 반복해야 했다. 이유식을 만들 때는 별의별 도구가 다 등장해 설거지 거리가 배는 늘어났었다.      


고무장갑은 기름기가 잘 닦이는지 느껴지지 않아 맨손으로 설거지할 때가 많았다. 행주를 하도 짜다 보니 엄지와 검지에는 까칠까칠 굳은살이 생겼다 없어지기를 반복했다. 손에 물을 묻힐 일이 많다 보니 핸드크림을 바르는 게 귀찮게 느껴졌다. 크림을 바르고 얼마 안 있다 또 물을 묻힐 텐데 미끌미끌한 느낌이 싫었다. 엄지나 검지에 낀 장식 없는 금반지가 예뻐 보여 반지를 샀다가도 거친 손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오래 끼지 못했다.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몇 년 동안 담아놓은 박완서 작가의 일곱 권짜리 산문집을 큰맘 먹고 샀다. 첫 번째 책 차례를 훑다 ‘여성의 손이여 바빠져라’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더 바빠져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페이지를 폈다.      


“1975년은 여성의 손이 어느 해보다도 바쁘고 여물어야겠다. 여성의 손이라면 남성은 단박 지난해의 보석 사건을 연상하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입에 거품을 물고 여성의 허영과 사치에 통탄과 분노를 폭발시킬 것이다.”     


‘보석 사건’이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고위층 인사의 아내들이 관련된 부정부패인 듯했다.    

  

“여성 스스로가 여성의 손을, 이런 1974년의 오욕으로부터 구해야겠다. 사회의 혼탁으로부터 가정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여성의 손은 든든해야겠고, 처자식을 위해서라는 변명을 마련해놓고 무력하게 타락해가는 남편네들을 구하기 위해 여성의 손은 여물고도 따뜻해야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의 손은 짭짤해야겠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부패에 마지막 소금이 돼야겠다.”     


무려 45년 전에 쓰인 글이었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얘기인 것 같아 어쭙잖은 반발심이 올라왔다가 ‘45년 전’을 생각하며 ‘그럴 수도 있지’ 했다.     

 

집에서 아내로서, 엄마로서는 지금보다 더 손이 바쁠 순 없을 것 같다. 더 이상 바빠지면 내 손이 보기 안쓰러워질 것 같다. 아무리 좋은 핸드크림도 필요가 없다. 물이 닿으면 손등의 민낯이 나타날 텐데  더 이상 거칠어지긴 싫다. 대신 산문의 제목을 나대로 해석해본다. 올해는 나를 위해 더 바빠지자고.


"가족을 위해서라는 변명을 마련해놓고 무력하게 스러져가는 나를 구하기 위해 나의 손은 여물고도 따뜻해야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손은 짭짤해야겠다. 그래서 내 앞으로의 인생을 사는 데 있어 소금 같은 한 해가 되어보자"라고 마음먹는 편이 좋겠다. 연초에 세운 계획들을 더 이상 미루지 않아야겠다. 운전면허 필기 문제집을 펴자!


  

 

매거진의 이전글 ‘혹시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