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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뫼 Mar 28. 2020

상상으로 도시를 여행하는 방법

20대를 연료로 쓰는 일


20대 극초반이던 2005년, 나는 마음속에 꿈이자 로망 하나를 품었다. 바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나는 것. 아르헨티나라는 나라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도시로의 여행을 꿈꿨다. 계기는 한 노래에서 시작됐다. 그해 학교 무슨 축제에 가수 불독맨션이 공연을 왔는데, 그 공연을 보고 불독맨션 노래에 빠지게 되었고, 지난 앨범들을 찾아 듣던 중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노래에 영혼을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불독맨션이 부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의하면 그곳은 “네 번의 기내식”을 먹고 “지루한 미국 영화”를 보다 “적도를 지나”면 도착하는 곳이었다. 또 활주로로 떨어지는 비행기에서 “언덕과 들판”을 볼 수 있고 “시에스타”와 “피에스타”를 즐기는 곳. 처음 그 노래에 빠진 후, 나는 주기적으로 노래를 들으며 그곳으로의 여행을 꿈꿨다. 그리고 딱 10년 후인 2015년에 그 로망을 이루겠다며 휴대전화 다이어리에 디데이를 설정해놓았다. 휴대전화를 바꾸면 꼭 잊지 않고 그 디데이를 챙겨 넣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참 묵묵히도 흘러갔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나는 나의 로망을 이루지 못했고, 심지어 그해 10월 결혼을 했다. 디데이 알람이 울렸을 때 나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꿈을 이루지 못했네’ 혹은 ‘역시 불가능한 꿈이었어’ 같은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저 ‘디데이 알람이 울렸네’ 정도의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스페인어 초급 책을 몇 장 들춰보기도 하고, 탱고 공연을 보러 가기도 했지만 사실, 그곳으로의 여행은 아주 먼 꿈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준비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을 거치는 동안 나는 정신없이 바쁘게, 한없이 지루하게, 하지만 꾸준히 열심히 살았다. 나에겐 ‘부에노스아이레스’ 말고도 다른 꿈들이 있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했다. 이룬 것도 있고 이루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후회로 남는 것은 없었다.

     

난 어쩌면 그 로망을 이루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노래를 들을 때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곳의 풍경과 그 설렘이 좋고, 로망이라는 것을 하나 품고 있는 것이 좋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루지 못한 꿈이지만 그런 꿈을 품고 있었던 내가 조금은 귀엽게 느껴져 아쉽거나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난 이런 식으로 꿈꾸는 여행지가 한 곳 더 있다. (사실 난 상습범이었던 것이다.) 그곳은 영국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 OST 중 ‘Glasgow Love Theme’라는 곡이 있다. 이 영화의 OST는 워낙 유명하고 모두 좋지만 난 특히 이 곡을 좋아한다. 이 곡은 조금 슬픈 장면에 쓰였다. 친구의 신부가 된 여자를 좋아한 마크라는 남자가, 온통 그녀로 가득한 결혼식 동영상 테이프를 그녀와 보게 되는 장면이다. 그저 음악이 좋았기에 사실 이 음악이 등장하는 장면은 중요하지 않다. 그 장면도 나중에 찾아보고 알았다. 나는 가사도 없는 이 음악을 들으며 사진으로 본 그 도시를 그리고, 그곳을 여행하는 나를 상상한다.


'Glasgow Love Theme' OST가 쓰인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한 장면이다. 러브 테마라고 하기엔 슬픈 장면.

      

요즘은 주로 아이를 재우기 위해 방안에 누워 있을 때 이런 상상을 한다. 지금은 부에노스아이레스도, 글래스고도 아닌 유럽의 어느 추운 도시다. 상상 속의 나는 적당히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장갑과 모자도 챙겨 쓰고 그곳을 여행을 한다. 내가 상상하는 장면은 꽤 구체적이다. 내가 머무는 숙소의 모습, 몇몇의 관광지를 간 후 그 지역의 소문난 식당에서 현지 음식을 먹는 모습 등이다. 아이가 잠들지 않을수록 나의 상상은 구체화된다.

     

사실 여행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닌 내가 이런 상상을 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고, 누군가는 행동력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런 로망을 품고 있는 게 좋다. 심지어 꿈에 그리는 세 번째 도시가 빨리 나타났으면 좋겠다. 지금 주어진 환경에서 하루하루 묵묵히 살아가는 나에게 이런 상상은 작은 일탈이자 즐거움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소중하지만, 사람이기에, 더 즐거운 경험을 해보고 싶은 사람이기에 언젠가는 꼭 그곳에 가보겠다는 마음으로 로망을 품는다.

      

그리고 이런 로망을 품게 해준, 그 시절에 만난 음악들이 나는 아직도 참 소중하다. 지금은 그때처럼 즐겨 듣지 않지만 우연이라도 그 음악을 들으면 나는 금세 그 음악을 들었던 601번 시내버스를 탄 20대가 되곤 한다. 어떤 것은 넘쳐나고 어떤 것은 너무나 모자랐던 그때를 지금의 연료로 쓸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슬픈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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