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많은 콤플렉스 중, 가장 오래 내 영혼을 갉아먹은 것은 단연 ‘곱슬머리’다. 곱슬머리를 처음으로 콤플렉스라고 인식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한다. 내 앞자리에 앉은 여자애의, 어깨가 훨씬 넘는 머리카락은 그야말로 쭉쭉 뻗은 생머리였다. 내 곱슬머리의 비교 대상을 발견한 것이다. 그 아이가 매력적으로 보이던 순간은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척’ 하며 어깨 뒤로 넘길 때였다. 곧게 뻗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정리될 때 내 눈동자도 머리카락 끝을 따라 움직였고, 그 생머리가 너무 부러워 난 뒤에서 대놓고 그 아이의 머리카락을 감상하곤 했다.
외모에 부쩍 신경을 쓰던 중학생이 되자 ‘곱슬머리 극복’은 내 지상 과제가 되었다. 곱슬머리인 친구와 함께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정보들을 열심히 적용시켜 봤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무엇도 나에게 만족감을 주지는 못했다. 컴백한 모 남자 아이돌 가수가 곱슬머리에서 생머리가 됐는데, 일본에 가서 수술을 하고 온 덕분이라는 소문에 그가 한없이 부럽기도 했었다.
그러다 중3 졸업 무렵, 그 어떤 곱슬머리도 펴준다는 ‘매직’이라는 신 미용 기술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엄마는 고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나에게 그것을 선물해주었다. 동네 미용실만 다니던 나는 그때 처음 언니와 함께 이대 앞 미용실에 갔다. 기대 반, 두려움 반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정말 ‘매직’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음을.
매직 시술을 받은 곱슬머리가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매직을 해야만 한다. 그 덕분에 나는 고3 일 년을 제외하고, 결혼을 한 다음 해까지 꼬박 15년을 매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스멀스멀 자라나는 뿌리 쪽 머리카락들을 잠재우기 위해 짧게는 4개월, 아무리 길어도 6개월에 한 번씩은 미용실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내가 ‘불행’이라고 말한 데에는 더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다른 문제가 있었다. 진짜 문제는 새로 자라는 머리가 전보다 더 곱슬머리로, 매직 시술을 한 모발은 건조해질 대로 건조해져 푸석해지고 머리카락의 모양이 변형된다는 것이었다. 난 이 점이 정말이지 슬펐다. 오죽하면 삭발 충동까지 일었을까.
그러다 결혼을 하고 큰 결심을 하게 됐다. 곱슬머리로 태어난 나, 평생 매직을 할 수는 없으니 내 곱슬머리를 인정하자고, 15년 간 뜨거운 열과 독한 파마 약으로 지쳤을 내 머리카락에 치유의 시간을 주기로 했다. 매직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꼬불꼬불 자라나는 머리카락을 그냥 두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임신과 출산으로 파마를 할 수 없는 시기가 이어지자 자연스럽게 매직을 하기 위해서는 미용실을 찾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지난하고 때로는 괴로웠다. 내가 마치 아름다움은 모두 포기해버린 사람 같았다. 정리가 안 되는 곱슬머리는 질끈 묶을 수밖에 없었고, 그 모습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촌스러워 보였다. 나는 왜 이런 모습밖에 할 수 없는 것인가, 거울을 보면 우울해지기도 했다.
아이를 낳고 키운 지 1년이 다 되어갈 무렵, 나에게는 변화가 필요했다. 계절이 가는지 오는지도 모르고 1년을 거의 집에서만 보내다 보니, 환기되지 않고 무겁게 내려앉은 실내 공기처럼 내 마음 또한 침체되어 매일매일의 기분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약 3년 만에 다시 매직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런데 결국 나는 3일 만에 내 선택을 후회하고 말았다. 내 머리카락이 매직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지, 매직이 원래 이런 건지 내 머리카락의 상태는 영 좋아지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모발 상태와 스타일을 보고 스트레스를 더 받는 건 아닌지 괜히 신경질이 나기도 했다.
난 이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콤플렉스는 입 밖으로 꺼내면 더 이상 콤플렉스가 아니라고 하던데 나의 경우에도 해당될까. 나는 내 곱슬머리와 친해지고 싶었다. 곱슬거리며 자기주장하는 이 존재를 납작하게 펴 누르고 싶지는 않았다. 적당히 길들이고 서로 예의 차리는 관계가 되어 아슬아슬하게라도 관계를 유지해 가고 싶었는데 다시 원점이다. 무엇부터 해야 할까. 아니, 어떤 마음부터 먹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