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엄마가 집에 왔다. 새로 담근 동치미를 들고 오셨다. 퇴근을 하고 마트에 들러 딸기를 사고, 내가 부탁한 떡볶이까지 포장해 오셨다.
딸아이는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가 쑥스러운지 엄마에게는 잘 가지 않고 나에게 매달려 같이 놀자고 했다. 나는 딸에게 딸기를 씻어 주고는 배가 너무 고파, 거의 쉬지도 않고 떡볶이를 먹었다. 엄마 얘기에도 거의 고개를 들지 않고 간단한 리액션만 했다.
떡볶이를 먹고는 같이 놀아달라는 아이 옆에서 레고 놀이를 했다. 엄마와 얘기를 하려고 할 때마다 “엄마, 엄마, 엄마” 하고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아이의 요구에 엄마와의 대화는 계속 끊겼다. 겨우 남동생에 대한 얘기를 몇 마디 나누었다.
엄마는 마스크를 낀 채 식탁 옆 스툴에 앉아 있다 집으로 가셨다. “연속극 보러 가야겠다”며 스툴에서 일어나셨다(우리 집에는 TV가 없다). 나는 엄마에게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손녀딸과 좀 더 적극적으로 놀아주시지.’ 아이가 엄마에게 “할머니 이름이 뭐예요?” 하고 물어봤을 때, 바로 대답을 안 해주고 “네 이름은 뭐야?” “엄마 이름은 뭐야?” “리현이(언니네 아들)도 엄마 이름을 알더라” 등의 얘기를 먼저 한 것도 서운했다.
그런데 이내 엄마가 이해됐다. 마스크를 벗었다가 괜히 딸네 집에 피해를 주면 안 되니까. 그러다 보니 마스크를 쓴 채 손녀와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놀아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엄마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기는 엄마네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마네 집이 아니어서 편하지 않았던 거다.
나도 내가 살았던 친정에 갔다 와서 “우리 집이 제일 편하다!” 하는 마당에 엄마는 살지도 않은 딸네 집이 편했을 리 없다. 또 나는 어땠나. 밥 먹는다고 엄마 얘기는 건성건성 들으며 온 신경은 아이에게만 쓰고 있었으니 엄마가 도리어 무안했을 것이다. 연속극은 핑계였을 지도 모르겠다.
엄마를 손님이라고 생각해보자. 오늘 우리 집에 온 손님은 집에서 직접 담근 동치미와 고당도 딸기, 그리고 집주인 저녁까지 표장해 왔다. 그런데 집주인은 손님이 사 가지고 간 딸기만 몇 개 내어주었을 뿐, 안부를 묻지도 않았고 눈 맞추고 대화를 하지도 않았다. 내가 과연 엄마에게 서운해할 자격이라도 있는 건가.
이제, 엄마가 우리 집에 오셨을 때만큼은 엄마를 손님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도 아주 귀한 손님으로. 엄마라는 손님은 우리 집에 오실 때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다. 매번 먹을 것을 챙겨 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집주인 가족을 아주 많이 생각하고 사랑하지 않는 한, 누가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 가족이 밖에서 귀하게 대접받기를 바란다면 내가 먼저 그렇게 하는 게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