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개인의 취향이 드러나는 부분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의 취향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음악이다. 20대 때 나는 밴드 음악을 좋아했다. 2000년대는 인디 뮤지션들의 전성기였는데, 인디 뮤지션 중에는 밴드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밴드 공연을 찾아가서 들을 정도의 열정은 없었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CD를 사서 듣는 정도였다. 생각해 보니 버스나 지하철에서 그런 음악을 참 열심히 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시내버스로 그때 오갔던 길을 지나가면 당시에 내가 즐겨 들었던 음악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밴드 음악이 좋았던 가장 큰 이유는 보컬 못지않게 존재감을 뽐내는 악기들의 소리가 정말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베이스, 기타, 드럼이 선사하는 리듬과 사운드는 내 안에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키는 마취제 같았다. 내가 연주하는 것처럼 손가락 리듬을 타면서 들으면 아주 작은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연주는 못해도 입으로 음표들을 따라 부를 수 있었다.
밴드 음악이 좋았던 또 다른 이유는 노래 주제가 사랑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일상적인 노랫말도 많았고 마음속 고민이 담긴 가사도 많았다. 목적 없이 시간과 공간을 부유했던 20대의 내가 밴드 음악을 좋아한 데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나에게 밴드 음악은 청춘이자 꿈이고 때로는 어설픔이기도 하다.
지금은 밴드 음악을 거의 듣지 않는다. 밴드 음악은 밴드 음악만 연달아 들어야 제맛인데 집에서 가만히 음악만 듣고 있을 일은 거의 없고, 출퇴근도 안 하니 긴 시간 음악에 빠져 고개를 까딱거리거나 발 스텝을 밟을 일이 없다. 요즘 나의 음악적 취향은 범 아이돌이다. '범'이 붙은 이유는 그룹이 아닌 솔로로 활동하는 젊은 가수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아이돌 음악도 각자의 세계관이 있다고 하는데, 솔직히 나는 가사에 담긴 세계관까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곡의 선율이 아름답거나 훅이 귀에 꽂히는 곡들을 좋아한다. 그런 노래들은 한 번만 들어도 귀에 착 감긴다. 당연히 대중에게도 인기가 좋은 곡들이다.
아이돌 노래가 매력적인 이유는 멤버들의 다양한 목소리로 계속 변화를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분명히 랩은 아닌데 굉장히 빠른 속도로 우리말과 영어가 섞인 가사를 내뱉는 부분에서는 아이돌도 가수라는 걸, 프로 직업인임을 느낀다. 나는 가사를 보고 불러도 가사가 씹혀 따라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가 없는데 말이다. 솔로나 듀오 가수들의 노래도 많이 듣는다. 아이유나 악동뮤지션이 대표적이다. 음악도 좋고 아이돌의 음악에 비해 비교적 가사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아이돌 음악을 들을 때는 주로 유산소 걷기 운동을 할 때다. 밴드 음악에 비해 악기의 존재감이 크지 않아 악기 리듬을 탈 필요가 없다. 악기 리듬이 걷는 속도나 리듬과 엇박자가 나면 운동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지양하게 됐다. 또 연달아 들어야 제맛인 밴드 음악에 비해 아이돌 음악은 단타로 듣고 빠질 수 있다. 이건 뭐 아이돌 음악이 대개 디지털 싱글로 발매되니 한 앨범을 연달아 들을 수도, 들을 필요도 없다. 요즘에는 뉴진스, 아이브, 오마이걸, 레드벨벳 노래를 듣는다.
아이돌 노래를 듣다 보면 가끔 현타를 느낀다. 내일모레면 마흔인 아줌마가 10대 후반, 20대로 구성된 아이돌의 노래를 듣는다는 게 어딘가 모르게 ‘쪽팔린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모든 모습을 이해해 줄 것 같은 친구들에게 이런 나의 취향을 고백했다.
“아이유도 스물다섯이 지난 지 5년이나 넘었는데 내일모레 마흔인 난 왜 지금 ‘팔레트’가 이렇게 좋냐? 가끔 생각하면 좀 쪽팔려ㅋㅋㅋ"
“언니 언니, 나도 좋아해요. 나는 요즘 뉴진스 왜 이렇게 좋아요?” (나보다 두 살 어린, 내일모레 서른여덟인 동생)
“야, 아이유 노래는 다 좋아하지!! 노래 좋아하는 게 뭐?” (나랑 동갑이 내일모레 마흔인 친구)
친구들의 말에 조금 안심이 된다. 그래, 좋은 노래 좋아하는 게 뭐 어때서.
대중적인 노래를 좋아한다는 건 그 시대를 살았다는 증거일 수 있다. 세대별로 좋아하는 음악이 다른 건 각 세대의 젊은 시절 유행한 노래가 다르기 때문이니까. 부모님 세대는 젊었을 때 최백호, 패트 김, 최진희의 노래를 들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런 음악을 좋아하는 거지, 내가 60, 70대가 된다고 최백호의 노래가 좋아지진 않는다. 그래서 어른들이 “마음만은 청춘”이라고 하는 말은 정말 반박할 수 없는 맞는 말인 거다. 나도 내가 좋아했던 밴드의 음악을 들으면 청춘이 생각나는 것처럼.
지난주 선배들 가족과 다 같이 놀러 갔을 때 유치원생과 초등학교 3, 4학년 아이들이 장범준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를 떼창하는 걸 보고 사실 놀랐는데 이렇게 생각하니 놀랄 일도 아니다. 같은 시대를 살며 음악적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추억을 공유한 순간이었다. 아이들이 나중에 이날을 기억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