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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뫼 Dec 23. 2022

난 다시 태어나면 라면이 될 거야





“오빤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어?”

“넌…?”

“난 나무가 될 거야. 한 번 뿌리내리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 나무.”


     

커다란 눈망울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주르륵 흐를 것 같은 문근영이 드라마에서 다시 태어나면 나무가 되고 싶다고 말할 때, 서울 변두리에 사는 까무잡잡한 한 소녀는 바쁘다는 고3 언니를 앞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시 태어나면 라면이 될 거야. 따뜻한 국물이 찰랑이는 컵라면.” 

     

당시 삼양라면에 꽂혀 있던 나는 내 방 장롱에 늘 두세 개의 작은 용기 컵라면을 비상식량으로 쟁여 두고 있었다(지금 생각해 보니 고등학생이 비상식량을 저장해 두는 것도 웃기지만 그 라면은 늘 그다지 비상하지 않은 시국에 장롱에서 나왔다). 라면을 싫어하는 한국인이 있을까 만은 나도 우리 가족 중에서 내로라라는 ‘라면 덕후’였다. 여덟 살 남동생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튀김우동을 선물할 만큼 내 사고의 흐름은 늘 라면을 향해 있었다. 남동생은 누나가 고른 선물이 인상적이었는지 서른이 된 지금도 그때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억하고 있다.


내 휴대폰 사진첩에서 어렵게 찾은 컵라면 사진. 컵라면은 특별한 음식이 아니라 찍어 놓을 일이 거의 없다. 


맞다, 한국인은 거의 모두가 라면을 좋아한다. 그런데 나는 ‘국물파’라는 분명한 노선이 있다. 짜장라면을 사는 일은 1년에 한 번 정도 있을 일이고 여름에도 비빔면에는 잘 손이 가지 않는다. 다섯 봉지가 들어 있는 번들 하나를 사면 여름내 다 먹지 못하고 가을, 겨울을 맞이한다. 라면도 유통기한이 있어 봄맞이 청소를 할 때 발견된 비빔면은 가차 없이 쓰레기통행이다. 분말스프도 없는 비빔면 따위가 가뜩이나 좁은 주방 수납장을 차지하고 있었다니, 그것을 이제야 알아챈 나 자신을 한심해하면서 말이다.

       

난 사실 모두가 ‘라면 하면 국물이지!’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다. 우리 가족은 보통 라면을 먹을 때 국물도 거의 먹는 편이었고 그 감칠맛 나는 맛있는 국물을 남기기는 쉽지 않았다. 라면을 면 때문에 먹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안 건 중3 때 같은 반 친구를 통해서였다. 주말에 부모님이 집을 비우신다는 그 친구의 소식에 친한 친구들 몇몇이 각자 어렵게 허락을 받고 문제의 친구네 집에 모였다. 


토요일 하루를 보내고 일요일 아침이 되었다. 친구들끼리 모여 자고 난 다음 날 아침 메뉴는 의심의 여지없이 라면. 가장 큰 냄비에 라면 5개를 끓였다. 면을 모두 건져 먹었을 때쯤, 친구들이 하나둘 젓가락을 내려놓았고 나도 그랬다. 국물을 떠먹기 위함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옆에 있는 집주인 친구 그릇을 봤는데 그릇의 절반쯤 국물이 남아 있었다. 내가 물었다.

     

“국물 안 먹어?”

“응.”

“국물을… 왜… 안 먹어?”

“원래 안 먹어. 난 면만 먹어.” 

    

더 이상 물으면 왠지 서로 어색해질 것 같아 더 묻지 않았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왜 원래지?’ 그리고선 집에 와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는 듯이 엄마와 언니에게 말했다. “라면을 면만 먹는 사람도 있어!” 그 후로 한동안 나는 누군가와 라면을 먹으면 상대방이 라면 국물을 다 먹는지 안 먹는지 은근히 확인했다. 국물을 남기는 사람이 있거든 속으로 ‘이 녀석 집 좀 사나?’ 하고 생각했다. 실제 그 친구는 내가 삐삐도 없던 중3 때 모토로라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그리고 나는 왜 그렇게 라면 국물을 좋아했던 걸까. 내가 라면을 몇 살 때 처음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 속에 가장 오래된 라면과의 추억은 초등학교 2학년 정도다. 엄마는 아빠 월급날이 되면 은행에서 월급을 찾아 집에 오는 길에 항상 시장에 들렀다. 한 달 중에 가장 풍성한 장을 봐 오는 날이다. 장바구니에는 라면도 있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인 나는 매운 라면을 아직 잘 못 먹었기 때문에 엄마는 늘 너구리 순한 맛을 사 오셨다. 엄마는 나와 언니를 위해 너구리 한 봉지를 끓였고, 우리는 건더기 스프를 공평하게 반으로 나눠 각자의 그릇에 담았다. 당시 너구리 순한 맛에는 동그란 튀김 플레이크가 들어 있었는데 그 개수가 누구 한 명에게 치우치면 안 되었기 때문에 언니와 나는 그 작업에 굉장히 날을 세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라면을 먹을 일이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공무원인 아빠의 월급으로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이라)네 식구가 풍족하게 생활하기는 어려웠으니까. 한 달에 한두 번 먹는 라면이니 그 감칠맛을 최대한 맛보기 위해 면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국물도 남길 수가 없었겠지. 그런 습관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그 당시 내가 어린 마음에라도 ‘이까짓 라면 따위 맘껏 먹지도 못하고 국물까지 싹싹 비워야 하다니!’라고 생각했다면 우리 집 형편이 좀 나아진 후에 나는 어쩜 ‘이까짓 라면, 면만 건져 먹고 국물은 하수구에 냅다 버려 주겠어!’라고 결심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내가 언니와 라면 한 봉지를 나눠 먹었던 그때를 소중한 추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실제로 그날 햇살이 우리가 라면을 먹던 거실 밥상이 있는 곳까지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 속의 그 장면은 따뜻한 아이보리색 빛으로 가득하다. 엄마가 양손 가득 장을 보고 현관에 들어서던 장면, 밥상의 위치, 라면 냄비를 들고 부엌에서 오던 엄마의 모습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거짓말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엄마는 라면 한 봉지 넉넉하게 먹이지 못한 그때를 슬프게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까. 부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여담을 조금 늘어놓자면 라면 국물을 남긴 적 없는 내가 선택한 나의 남편은 배가 부르면 심지어 라면의 면도 남기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10년째 놀라는 중이고.


엄마, 엄마! 배부르면 라면 건더기를 남기는 사람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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