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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뫼 Jan 20. 2023

엄마표 패스트푸드, 잔치국수




뷔페식 식사가 나오는 결혼식장에 가면 내가 꼭 먹는 음식이 있다. 잔치국수. 면은 불어 있어도 뜨끈한 육수와 김치, 파 고명을 올리면 나에게는 꽤 먹을 만한 잔치국수가 된다. 요즘 뷔페식당이나 호텔 조식을 먹으러 가면 쌀국수가 많이 보이던데, 쌀국수가 잔치국수의 자리를 대신해 가는 것 같아 못내 아쉽다. 또 칼국수 전문점은 흔해도 잔치국숫집은 찾는 게 어려워 둘 다 파는 곳에 가면 난 왠지 소외되어 있을 것 같은 잔치국수를 선택한다. 고깃집 후식 메뉴에는 왜 잔치국수가 별로 없을까. 뜨아와 아아가 있는 것처럼 후식 국수도 차가운 냉면과 뜨끈한 국수를 고를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잔치국수 러버다. 


어렸을 때부터 결혼 전까지 엄마와 살 때는 잔치국수를 자주 먹었다. 엄마가 가끔 아량을 베풀어 잔치국수(사실 우리 집에서는 잔치국수라는 말 대신 국물국수라고 더 많이 불렀다. ‘잔치국수’는 너무 잘 차려진 느낌이 난다)와 비빔국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적이 있는데 나는 늘(여름에도 물론!) 잔치국수였다. 잔치국수는 일요일 점심 단골 메뉴였다. 가게에서 파는 것처럼 다양한 고명은 없지만 엄마가 끓여준 잔치국수는 정말 맛있었다. 


엄마가 단출하게 끓이는 잔치국수에는 달걀과 양파 정도만 들어갔다. 달걀은 지단으로 부치지 않고 국물에 풀어 넣는 게 엄마표 잔치국수의 국룰. 그리고 사 먹는 잔치국수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고명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건 육수를 내고 난 다시마였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다시마를 길게 채 썰어 국수와 같이 먹으면 흐물흐물한 양파와 달걀 사이에서 쫀득한 식감으로 존재감을 뽐내는 역할을 했다. 


엄마표 잔치국수에 대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학생 때 시험기간이 떠오른다. 시험을 보고 일찍 집에 돌아오면 점심으로 잔치국수를 자주 먹었다. 두 과목을 보고 집에 가면 아직 정오도 되기 전이라 엄마가 집안 청소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창문은 다 열려 있어 집안 공기는 썰렁하면서도 신선했다. 주방, 거실, 각 방 모든 물건들은 제자리에 있었고 윤이 날 정도로 집안 곳곳이 다 깨끗했다. 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엄마는 벌써 끝났냐고 물으며 서둘러 창문을 닫고는 “뭐 먹을까?” 하고 물었다. 엄마가 먼저 “국수 끓일까?” 하면 나는 정말 올해 여섯 살 내 딸이 하는 것처럼 “오! 좋아!” 하며 격한 동의를 하곤 했다.


광장시장에서 먹은 잔치국수. 빈대떡과 떡볶이, 꼬마김밥 등 광장시장에서 먹을 수 있는 다양한 음식을 다 파는 식당이었는데 나의 주문으로 이날도 잔치국수를 먹었다.


 

한편, 중학교 1학년 때 나는 한창 H.O.T.에 빠져 있었다. 나는 오빠들이 나오는 라디오를 녹음해 듣고 또 들었다. 청취자가 보낸 재미있는 사연을 H.O.T.가 읽어주는 라디오 코너가 있었는데 그땐 그게 뭐 그렇게 재밌었는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오빠들이 나오는 라디오를 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실제로 옮겼다.


어차피 다음날 볼 시험공부도 밥을 먹고 해야 했으니 점심시간 중에는 나도 자유였다. 엄마와 함께 국수를 먹으며 엄마에게 반강제로 오빠들의 목소리를 듣게 했다. 나는 이미 여러 번 들어서 오빠들의 추임새까지 모조리 외울 정도였고, 엄마에게 “재밌지?ㅋㅋㅋㅋㅋ” 물으며 혼자 킥킥거렸다. 엄마는 당연히 재미가 없었을 거다. 나도 내 딸이 <캐치! 티니핑>을 보면서 자기가 웃긴 포인트를 따라 하는데 솔직히 동의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난 억지웃음을 띠며 “그랬어?”라고 반응해 주는데 그때 엄만 어떻게 했더라? 잘 생각이 안 난다. 오빠들의 목소리에 빠져 엄마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알아챌 틈이 없었다. 


엄마는 집에 있는 가장 큰 사발에 국수를 한가득 말아주었다. 엄마는 국수를 먹을 때 꼭 하는 말이 있는데 “국물도 같이 먹어.”였다. 한 번만 하는 게 아니라 가족들이 면만 먹고 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 때마다 여러 번 그 말을 했다. '국수는 국물이 맛있는 거'라며 엄마도 솔선수범해서 국물을 싹 비웠다. 국물은 정말 맛이 있었고, 엄마가 만든 잔치국수에 고명이 몇 개 안 들어갔어도 내가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건 정말 국물 덕분이었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내 입덧은 ‘먹덧’이었다. 임신 중에 엄마 음식이 정말 많이 생각났는데 그중 하나가 채 썬 다시마가 들어간 잔치국수였다. 처음 혼자서 국수를 끓여 본 날이었다.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내고 엄마가 한 것처럼 국물을 낸 다시마를 채 썰어 올리고 표고버섯까지 넣어 국수를 만들었다. 별로 맛이 없었다. 신 김치를 넣어 겨우 김치 맛으로 젓가락질을 했다.


국수는 국물이 맛있어야 맛있는 거였다. 요리 경험이 많지 않은 데다 그동안 멸치 육수를 내서 끓은 국들은 그 육수를 베이스로 된장, 새우젓 등을 추가로 넣어 만든 것이었다. 순수 멸치 육수로만 국물을 만든 건 처음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은 엄마는 육수를 낼 때 나보다 멸치도 많이 넣고 말린 밴댕이를 넣어 끓인다는 점이었다.

 

엄마는 국수를 끓여줄 때마다 “간단해.”, “빨리 돼.”라는 얘기를 많이 했다. 난 그래서 정말 쉽게 만드는 음식인 줄만 알았고 쉽지만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을 하고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 지 7년이 넘었지만 난 아직도 집에서 잔치국수를 만들어 먹지 않는다. 처음 나 혼자 해 먹었을 때는 맛이 없어도 내가 만든 거라 겨우 먹었지만 식구들에게 그걸 먹일 용기는 없어서다. 나는 내 딸에게 “간단해.”라고 말하면서도 맛있게 만들어 줄 음식이 뭐가 있을까. 더불어 아이가 “오예!” 하고 반응해 줄 그런 음식. 


내가 엄마표 잔치국수를 이렇게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만든 사람, 먹는 사람 모두 만족하는 음식이기 때문일 거다. 만드는 이가 자주 선보인 만큼 먹는 이에게도 많은 추억을 갖게 할 테니까. 엄마의 국수와 내 10대 시절이 겹쳐 있다. 내 기억 속에선 영원히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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