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임오, 그 여름을 넘어]_#2.합혼례

#2. 합혼례

by 운울재

세손의 합혼례가 정해지자 경춘전은 드디어 제 이름자 같은 아름다운 봄날을 맞았다. 군주들의 연이은 국혼으로 두 명의 부마위가 새로운 가족이 가족이 되어 세손에게 큰 힘을 주고 있음에도 궁안은 적적하고 조용하였다. 폐세자와 선희궁의 상례와 어린 두 딸을 연이어 하가 시킨 혜빈의 마음을 헤아린 세손 내외가 자주 문안을 들었으나 혜빈궁에는 화기가 없었다. 흉사가 잇따른 혜빈궁 분위기도 어두웠고, 세손 내외 모두 말수가 적고 사이도 데면데면하여, 내외 문안 드는 날이면 경춘전엔 긴장감 마저 돌았다. 그리 조용히 지내다 세손의 합혼으로 전각 안이 시끌하였다. 궁인들끼리 삼삼오오 세손의 첫날밤과 태어날 원손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사람 사는 온기를 드러내니 절기가 상강을 넘어 초겨울로 들어섰음에도 전각은 안팎으로 훈훈하였다.


금상의 명으로 세손내외 합궁은 경춘전에서 치르게 되었다. 경춘전은 영민한 세손이 태어난 곳이라 칭찬하며, 그런 음덕이 있는 곳이니 속히 후사를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 명하시고는 은자까지 두둑이 내리며 잔치에 소홀하지 말라 당부하였다. 큰궁 차비내관이 몇 번이고 혜빈궁을 둘러보며 세손일을 살폈다. 성정 고약한 임금이었으나 세손에 대한 애정만은 한결같았다. 궁인들이 잔치일로 전각을 단장하느라 바쁜 때에, 덕오는 이복언니 덕경의 출산으로 특별휴가를 받았다. 덕경의 득남 소식에 혜빈이 크게 기뻐하며 산모와 아기에게

하사품을 내주며 언니에게 다녀오라 한 것이다. 하사 받은 품목이 산더미라 비자 두 명을 대동하고서야 궁을 나설 수 있었다.


덕경의 부군 낙성대감은 혜빈의 6촌 친척이었다. 학문이 높고 임금의 총애 깊어 혜빈이 믿고 의지하는 혈족이었고 세손에게 힘을 보탤 수 있는 큰 인물이라 혜빈이 오래도록 공을 들이고 있었다. 공사가 분명하고 깐깐하여 선을 분명히 하는 인물이라 쉬이, 혜빈의 편에 서지 않았다. 그런 낙성대감이 직접 덕오의 친부 성윤을 혜빈 사가의 청지기로 부탁하는 일이 있었다. 오랜 시간 사가의 일을 돌보던 청지기가 병이 들어 자리에서 물러나 새로운 사람이 필요한 때였다. 혜빈의 사가는 당대 최고의 권세가로 드나드는 이가 많았고, 산림의 규모가 컸다. 집안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청지기는 일처리가 단단해야 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혜빈의 친정아버지는 두 말없이 낙성대감의 청을 받아들이며 성윤네가 편히 살 수 있는 독립채를 내주는 등 낙성대감에 대한 예를 다하였고 낙성대감은 혜빈을 돕기 시작했다. 덕성대감이 공사를 구분 짓지 않고 세손의 편에 섰으며, 영민하기 이를 데 없는 청지기 딸 덕오를 알게 되었다.


덕오가 북촌으로 들어섰다. 혜빈의 사가를 다녀오라는 별도의 심부름도 없어, 곧장 덕경의 집으로 향했다. 길에서 서모를 마주치게 될까 마음이 불편해져 마을 안길에서부터는 걸음을 조심하고 있었는데 까치들이 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날며 오랜만에 북촌에 든 덕오를 소란스레 반겨주자 기분이 나아졌다. 명문대가들이 즐비한 초겨울 북촌 감나무 가지 끝엔 감들이 제법 남겨져 있었다. 까치 먹으라 남겨둔 두툼한 홍씨가 눈에 띄자 까치들을 향해 큰소리까지 내었다. “이리로 와서 먹어. 언능 먹어. 여기 많아. 입에 묻히지 말고 맛나게 먹어” 덕오가 까륵 웃으며 시끄러운 까치들에게 덕담 한 소절까지 올려 주자, 무거운 선물을 지고 뒤따르던 비자들이 따라 웃었다. 잘 웃지 않는 생각시가 이쁘게 웃으니 절로 웃음이 따라 나왔다.


아버지를 꼭 닮은 덕경은 인물도 자태도 고와 혼담이 많았다. 덕경을 보려고 집 담장 구석진 곳을 얼쩡거렸던 도령들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그리 큰 사달을 내지 않았더라면 덕경은 첩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고 저도 궁녀가 되지 않았을 테지. 덕주도 제 옆에 있었을 테고. 물론 혜빈과 세손과의 인연도 없었을 것이다. 서모에게 이런저런 학대를 받으며 사는 것 보다야 궁인으로 사는 게 나았지만, 궁 생활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혜빈이 뒷배로 있어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언제든 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삶이었다. 혜빈과 세손에게 덕오의 삶을 온전히 바치는 것이 아버지 빚 탕감 조건이었고, 덕주를 해한 놈을 찾으면 반드시 덕오 손으로 직접 복수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약조 또한 있었다. 세손이 무사히 보위에 오른 후에는, 덕오가 원하는 바를 살펴주겠다는 약조에 삶에 희망도 생겼다. 덕주의 삶까지 열심히 살아야 했다. 세손 또한 폐세자의 삶을 짊어지고 처절히 살고 있었다. 살아남은 이들끼리 연대감과 연민, 믿음이 깊었다.


입궁 후, 무예를 익히며 전의감, 상의원, 소주간과 생과방 등 온 전각을 드나들며 친우들을 만들었고 의술 또한 별도로 깊이 익히고 있었다. 간자 생활이긴 하였지만 다른 전각의 또래 친우들과의 만남은 힘든 궐살이를 이겨내는 즐거움이기도 했다. 의녀 아이들은 영민하고 깐깐했으나 얘기가 잘 통했고, 상의원 아이들은 새침하고 옷맵시며 온갖 장신구로 몸을 빛 내는 법을 잘 알았다. 소주간은 모든 견습 아이들이 모두 좋아하는 곳이었다. 생과방엔 혜빈의 본방 출신 막례가 있어 드나들기 좋았고 별식이 많이 챙겨주어 즐거웠다.

각 전각의 견습 아이들과는 두루 잘 지내고 있으나, 상궁이나 나인들은 덕오에게 날을 세웠다. 어리기는 하나 경춘전 본방 출신 궁인이라 선세자에 대한 악한 감정을 덕오에게 풀었다. 동무들과 함께 회초리를 맞을 일이 있더라도 남들보다 열 대는 더 맞았고, 남의 전각 출입이 잦다고 야단도 더 많이 들었다. 세손이 보위를 잇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도 들으라는 듯 수군거렸다. 사방에서 적대적이라 힘들었고, 세손 또한 선세자를 닮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덕오를 괴롭혔다. 각 전각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을 혜빈에게 샅샅이 고했다. 혜빈궁 내 간자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덕오의 일이었다. 고단했지만 세손을 무탈하게 보위에 올려야 했다. 궁에 들지 않았다면, 지밀에 있지 않았다면 제 나이에 이런 무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서자로 태어난 조카 걱정 때문이었는지 마음이 풀어지고 있었다. 덕주를 해친 그놈. 째진 눈 밑 가로 그어진 흉이며 독사 같던 눈빛을 한 그놈을 찾아 반드시 제 손으로 처단하고, 훌훌 궁을 떠나 비단치마 입고 허리춤에 엽전 겹으로 두르고 살 것이다. 보위에 오른 세손에게 시전 독점권을 얻어 청국이며, 왜며 세상을 맘껏 돌아다니며 살 것이다. 아버지는 실패한 그 돈 놀음. 저는 성공하여 월주각 인향행수 보다 더 멋들어지게 살아 볼터이다. 덕경의 집 앞에 다다르자 덕오는 풀어진 마음을 다 잡았다.


숯과 붉은 고추가 걸린 대문에 도착하자 옷이며, 혜를 탈탈 털었다. 삿된 것은 그 무엇도 금줄 걸린 저 문을 넘질 못할 것이다. 선물을 지고 온 비자들에게도 몸에 묻은 것을 털어내도록 한 후, 조심히 대문을 열었다. 낙성대감이 둘째 첩 덕경에게 준 별채는 아담했으나 기품 있었다. 낙성대감 본가와는 담을 맞대고 있었으나 수령 높은 배롱나무가 본채 담을 가려주었다. 덕경의 집에는 덕오의 작은 방도 꾸며져 있었다. 이복언니 덕경이 쉬는 날, 서모가 있는 집으로 가지 말고 예서 쉬라고 꾸며 준 방인데, 여느 양반댁 아기씨방처럼 주렴도 쳐 놓아 들어서면 마음이 편한 곳이었다. 후실을 대한 낙성대감의 묵묵하고 다정한 지원은 끝이 없었다. 이제, 낙성대감은 품계 높은 조정 대신이 아니라 제 조카의 친부였다. 혜빈이 그토록 세손 곁에 두고자 노력하던 혜빈의 귀한 혈족이 덕오의 가족이 되었다. 아기 낳느라 고생한 덕경이 건강한지 얼른 보고 싶었고, 고생했다 위로해 주고 싶었다. 친모가 살았다면 덕경처럼 다정했을까. 고운 얼굴로 항시 웃으며 저를 반겨주는 피붙이. 덕주를 그리 처참히 잃고도 살 수 있었던 건, 덕경의 따뜻한 품이 있어서였다.


금줄 쳐진 집 안으로 들어서니, 작은 안마당이 시전 마냥 웅성거렸다. 본가 가솔들과 정부인이 와있었고, 큰 후실이 마루에 선 덕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얼굴이 허옇게 질린 덕오가 쇠 같은 소리를 냈다. “성! 덕경 성. 왜, 나와 섰어. 아기 낳은 산모가 이 추운 날 어찌 밖에 섰어. 감모 들면 어쩌려고.” 갑작스레 나타난 덕오 모습에 놀란 덕경이 순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눈물이 흐르던 참에 덕오가 들어 선 것이다 제가 첩으로 이리 험하게 사는 꼴을 덕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우는 모습까지 보였다.

언젠가는 첩으로 사는 꼴을 알겠지만, 훗날이었으면 했는데. 벌써 들켜버려 마음 아팠다. 제언니가 비록 첩실이나 남편 품에서 안온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속 깊은 아이가 마음 곪을 걸 생각하니 흐르고 있는 눈물을 빨리 지워야 했다. 혜빈이 뒤를 받쳐 주고 있다고 하나 어린 궁녀였고 늘 죽음을 방비해야 하는 삶이었다. 덕주를 잃은 적개심에 손발이 터져 나가도록 무예를 익히고 견습궁녀 녹봉으로 식구들에게 힘이 되고자 제 힘을 다하는 덕오였다. 혜빈이 영특한 덕오를 훗날 긴히 쓰고자, 혜빈 사가의 청지기 식구들까지 챙겨주고 있었다. 아버지가 청지기 생활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빈틈없었던 아버지였지만, 자신만만했던 곡물 시세차익 일이 실패한 후, 제 딸들이 후실로, 궁녀로, 죽음으로 이어진 것을 견딜 수 없어했다. 몰락한 양반의 삶보다는 상민처럼 살더라도 부자로 살기를 원했고, 돈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며 세상살이 자신만만했던 이였다. 평생 돈벌이에 골몰했고 식구들에게 무정했던 양반이 딸들의 삶에 무너져 있었다. 덕오는 그런 아버지를 헤아리지 못했고 원망하는 마음이 깊었다. 쌍생인 덕주를 잃은 슬픔이 너무 커 한동안 말을 잃었던 아이였다. 제가 사는 참모습까지 보았으니 마음을 어찌 다독여주어야 할지 덕경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첫 자식을 낳아 기뻤다. 아들이어서 더 기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자식이어서 좋았다. 허나, 딸만 낳은 큰 첩이 몸 푼 지 이레도 되지 않은 덕경을 찾아와 아들 낳아 유세한다고 패악을 부렸고, 큰 첩을 말린다고 찾아온 정부인은, 후실이 낳은 아들은 어차피 본가에 입적되어 제 자식이라고 못을 받고 있던 참이었다.


덕오가 마당에 선 채로 정부인에게 정중히 인사 후, 눈을 똑바로 정부인에게 맞췄다.

“혜빈 자가께서 산모와 아기씨에게 선물을 내리셨습니다.”

“그러셨는가. 혜빈마마께 뭐라 감사의 답신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

“항아님은, 너무 고와 선녀님 같으시네” 놀란 정부인이 공치사를 하였다.


비자들이 혜빈의 하사품들을 안마당에 모두 내려 펼쳐 놓자 정부인이 허옇게 질렸다. 큰 첩실도 놀랬는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질 좋은 마른미역에 생선식혜, 육포, 생선포 등 궁중음식이 광주리 마냥 큰 찬합에 가득했고, 바로 섭식할 수 있도록 삶은 국수며 도미찜 등이 들어있는 찬합통이 몇 단 이나 더 있었다. 돈 주고도 쉬이 구할 수 없는 질 좋은 비단과 면포 또한 두툼했다. 낙성대감이 혜빈의 일족이라고 하나 조선 천지 후실이 아들을 낳았다고 왕실에서 선물을 이리 내리시는가. 낙성대감에게 보내는 선물인지 가늠해 보다, 정부인은 얼떨결에 덕오의 인물을 칭찬한 것이다. 곧 열다섯 살이 되는 덕오는 지난여름 초경을 시작하였고 여인의 태를 갖추며 고운 인물을 피우고 있었다. 원래도 고왔던 아이였다. 영악하고 강단져서 서모가 제법 속을 끓였다는 아이였다. ‘후궁으로 키우시는가’ 언뜻 그 생각에 이르자, 정부인은 덕오를 자극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연유로 제 성님이 찬 마루에 섰는지 여쭤도 될는지요. 혜빈자가께 오늘 모습을 말씀드려도 됩니까. 자가께서는 탄생한 아기씨와 덕경성님의 안녕을 걱정하셨습니다.”


덕오가 노기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정부인과 큰 후실을 똑바로 노려보며 혜빈을 들먹였다.

혜빈궁의 지밀로 사 년을 생활했다. 여인들 싸움에 어찌 대처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고 권력이 무엇인지 알아가고 있는 덕오였다. 정부인이 혜빈의 선물을 가져온 어린 궁녀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가져온 물품들은 모두 혜빈이 정성을 보인 것이었다.


“덕오야, 그만해. 어서 들어와. 추운데 오느라 고생 많았지.”

덕경이 다급히 덕오를 불렀다.

“혜빈께서 어쩌자고 이리 많은 하사품을 내리셨는지. 자네들도 무거운 짐 지고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빨리 이쪽으로 들어오시게”

덕경이 비자들을 마당 안쪽으로 들게 한 후, 찬모에게 비자들 먹을 것을 챙기도록 했다.

“그래, 우리 항아님. 오느라 고생 많았네. 빨리 태어난 조카 봐야지.”

정부인이 그리 말하고 큰 후실을 재촉하며 대문을 빠져나갔다.

나가는 두 여인을 덕오가 임오년 원수 보듯 보고 있었다.

두 여인이 데리고 왔던 가노들까지 빠져나갔음에도 덕오는 마당에, 덕경은 마루에 한동안 서 있다 아기가 집이 떠나가도록 울기 시작하자 덕경은 덕오를 데리고 아기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젖내음...언니에게서, 아기에게서 나는 젖내음이 따뜻한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울어서 얼굴이 빨개진 작은 아기를 보자마자 덕오는 눈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아기에게 반가이 인사해야 하는데 어찌해 눈물이 도는지 알 수 없었다. 덕경이 젖을 잘 물릴 수 있도록 유모가 울어서 바둥거리는 아기를 조심히 안겨주었다. 제 언니가 서툰 어미여서 웃음이 났다. 서툰 어미 곁에서 온 힘을 다해 젖을 찾아대는 아기 모습에 덕오가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 우리 열심히 살자. 너는 온 힘을 다해 그리 잘 먹어 건강하고, 나는 풀숲에 길을 내며 살 길을 찾을 것이다. 아기를 가만히 보던 덕오의 입꼬리가 올랐고 걱정스레 덕오를 쳐다보던 덕경도 따라 웃었다.


휴가가 끝나고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운종가 저잣거리에 들러 빛깔 고운 비단 천이며 값나가는 솜뭉치들을 샀다. 궁에서도 얻을 수 있는 물품이지만 합례 선물을 손수 마련하고 싶어, 사비를 들여 구했다.

궁에 드니, 여나인이 합례 전 시침궁인으로 승은을 입어 정칠품 전의로 승차하였고 별채 전각까지 주어져 경춘전이 떠들썩했다. 동지며 합례며 큰일들이 연이어 있어 잔무가 많았고 승은궁녀인 여나인이 덕오에게 유달리 트집을 잡아대어 피곤했지만, 덕오는 비단 기러기 한 쌍 만드는 일에 성심을 다했다. 옅은 분홍색과 감색 빛감을 넣고, 세손 기러기엔 솜을 빵빵히 넣어 큰 덩치로 만들고, 세손빈 기러기는 여리하고 곱게 만들어서 서로 다정히 기대어 있는 기러기 한 쌍을 완성시켰다. 제법 잘 만들었는지 혜빈이 세손 내외에게 덕오가 만든 기러기 한 쌍을 자랑하며 해로하라는 덕담을 해주었다. 혜빈이 해주는 덕담에 세손빈이 얼굴을 붉히며 덕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세손빈의 감사 인사에 기뻐하며, 세손 내외를 보던 덕오의 얼굴이 굳었다. 세손이 노려보고 있었다. 무감한 듯 쏘아보는 세손의 저 표정을 알고 있다. 화난 얼굴이다.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마음이 서운한 덕오가 얼굴을 밑으로 내리며 세손의 눈을 피했다.


세손의 합궁이 무사히 치러졌고 시끌했던 동지 행사도 끝나 혜빈궁이 다시 조용해졌다.

덕오는 합혼례가 왠지 서운해 밤에는 해금 연주에, 새벽녘에는 무예 연마에 더 힘을 쏟았다. 수습 내의녀 해조가 준 동인형에 침도 열심히 꽂았다. 몸을 움직이면서 낯설고 혼란한 감정을 털어 내려 노력하였고 세손 내외 문안인사 오는 날엔 혜빈 침소에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곧, 다가 올 새해를 기다리며 덕오는 마음이 정갈하게 다듬었다. 모처럼 혜빈 처소에 혜빈과 세손 내외, 여나인까지 함께 하는 낮것상이 들어갔다. 혜빈 처소를 겉도는 덕오에게 다과상 드는 것을 도우라는 최상궁의 명이 있어 찻상을 들고 방에 들었다. 합례 후, 세손빈과 여나인이 각을 세우고 있기는 했지만 그동안, 혜빈궁은 대체로 훈훈했다. 얼굴을 밝게 하고 찻상 올림에 정성을 다 하고 있는데, 방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처음 느껴 보는 답답한 분위기에 다과상을 조심히 놓고 장지문 쪽으로 섰다.


“덕오야, 이리 오련.”

처소에 손님이 있는데, 혜빈이 홀로 앉은 날처럼 덕오를 곁으로 불러 손을 다정히 잡고는 눈을 맞추었다. 맞잡은 손을 한참을 다독이더니,

“덕오야, 아가. 세손께서 너를 후궁으로 맞고 싶어 하신다. 관례 전에도 얘기하셨는데,

오늘 다시 얘기하신다. 너를 후궁으로 맞는 일을 늦추고 싶지 않다 하시는구나.”


혜빈의 말에 세손이 잔기침을 연이어 하고, 세손빈의 눈가엔 핏발이 섰다. 여나인은 치맛단을 꽉 쥐고 앉았고, 혜빈에게 손이 잡힌 덕오가 떨기 시작했다. 나례희 광대 놀음도 아니고, 살아갈 날을 꼼꼼히 방비 해오던 덕오에게 예측치 못한 일이 들이 닥쳤다. 덕오 몸이 비바람 속 사시나무 처럼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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