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임오, 그 여름을 넘어]_#4.함유당

#4 함유당

by 운울재


세손이 영흥사로 찾아와 비단주머니를 건네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절기가 처서로 들었다. 나다니는 일이 많은 덕오는 아침저녁이라도 서늘해져 좋긴 하였으나, 세손의 탄일이 가까워지고 있어 바뀌는 절기가 마냥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내 너의 생일 선물을 손수 준비했으니, 너도 나의 탄일에 선물을 주어. 마음에 쏙 드는 것으로 주어’ 라며 강짜 부리던 세손 생각만으로도 눈 밑이 검어졌다.

생일선물로 받은 비단주머니 속에는 깜찍하고 예리한 은장도가 있었다. 단박에 뛰어난 장인이 만들었음이 알 수 있을 만큼 잘 만들어졌으나, 섬찟한 기분에 기쁘노라 표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앙증맞은 칼을 이리저리 돌려보다 펄쩍 뛰어올랐다. 손마디 만한 은장도 앞뒤로 힘차고 정갈한 세손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모(某)’와 ‘형운(亨運)’. 세손의 아명과 자였다. 놀라 숨이 멎는 듯하였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두 손을 공손히 포개어 큰절을 올려 하례품 대한 예를 갖췄다.


‘항시 몸에 지니거라. 나의 여인임을 한순간도 잊지 말 것이며, 부군에 대한 절개가 아녀자의 덕목임을 명심하거라.’ 겁박인지 선물인지 모를 것을 내어주고는 세손이 활짝 웃으니, 뭐라 대꾸도 못하였다.

백옥 삼작노리개가 마음에 쏙 들어 기쁜 중에, 금가락지 한 쌍을 보여주며 나누어 지니자며, 손수 손가락에 끼워 주니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세손이 갈수록 헌헌장부가 되어 가니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해지기도 하나, 세손빈의 서늘한 눈초리가 떠올라 더워지던 심장을 이내 가라앉았다. 세손 성정이 예민하고 수시로 불같이 화를 내며, 아랫사람 다스림에 엄정함이 지나치다고 세손궁 나인들의 불만이 많아 걱정이었는데, 오랜만에 뵙고 보니 따스함이 그득하여 마음이 놓였다.


하례품을 받은 직후, 두 번 다시 생일날 덕주를 찾지 말라는 청천벽력 같은 엄명이 내려졌다. 서운하여 눈시울을 적셨으나, 다음 생일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아비와 함께 소풍을 나가자 하였다. 범개와 함께 하여도 좋고 친우를 불러도 좋다 하였다. 범개네 강아지들과도 함께 놀자고 하니, 저의 생일을 함께하고자 하는 세손의 마음이 느껴져 생일날에 영흥사에 가지 않겠다 약조하였다. 덕주와 함께하지 않을 생일날이 낯설고, 저로 인해 세상을 떠난 동생에게 미안하여 며칠을 더 영흥사에 머물다 내려왔다.


생각이 깊었는지, 단지가 어깨를 툭 쳤다. 박상궁 처소였던 함유당 앞이었다. 박상궁은 폐세자에게 무참히 살해된 궁녀 출신 후궁이었다. 한미한 집안이긴 했으나 분명한 반가의 여식이었다. 덕오의 처지와 비슷한 왕실 여인이라, 얼굴도 모르는 그녀에게 애착을 느꼈다. 박상궁은 폐세자의 애정을 거부하다, 강제로 취해져 두 애기씨의 사친이 되었다. 왕손을 낳았지만 후궁의 품계를 받지 못한 왕실 여인. 강직하고 소탈하여 처소 내 궁비에게 조차도 격의 없이 대하여 따르는 이가 많았다고 하는데, 혜빈만은 늘 ‘빙애, 고것’이라 업수이 부르며, 제 인물 잘난 것 믿고 유세를 떨었다며 혀를 찼다. 박상궁 얘기가 많은 날엔, 경춘전 상궁과 나인들이 모두 긴장하였다. 심기가 불편한 날이었다.


함유당에 들어서니, 중전이 들어 있었다. 경춘전 나인임을 밝히고 중전에게 예를 올리니, 세손의 서형제들을 챙겨 주어 마음이 든든하다며 혜빈을 치하했다. 중전이 서안 위 그림을 조심스레 만지고 있었다. 슬쩍 보았음에도 미색이 대단하였다. 하얀 얼굴에 옅은 분홍색 당의를 입고, 쪽진 머리에 금개구리 첩지가 여인의 신분이 후궁임을 알렸다. 슬픈 눈으로 살포시 웃음 짓고 있는 비단 채색 그림이었다.

덕오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중전이 뿌듯한 기색으로

“어찌 이토록 곱게 생기셨는고. 사친이 고우니, 우리 찬이와 청근이도 어여쁜 것이지”.

중전의 칭찬에 두 아기씨 모두 환하게 웃었으나, 덕오 머릿속에는 안개가 피었다.

‘우리 찬이’라고 하셨는가.

경춘전으로 돌아가는 내내 초상화 속 여인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두 명의 아기씨를 낳은 후궁이 제 부군의 장칼에 난장질을 당해 죽었다. 피칠갑이 된 비단옷조각들을 시신에서 떼어 내면서도 함유당 궁인들은 곡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쉬쉬하며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박상궁의 죽음을 덮으라는 폐세자의 비열한 엄명이 있었다. 그 밤, 어미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아비를 본 돌배기 아기가 미친 듯 울어댔고, 우는 제 아들을 미치광이 폐세자가 궁 안 연못에 집어던졌다. 연못에서 건져 살려낸 왕손 이찬은, 말도 않고 울지도 않아 함유당 궁인들의 애를 오랫동안 끓였다 했다.


폐세자가 만행을 저지르고 있음이 중전에게 급히 보고 된 밤. 기어이 아끼는 저의 후궁에게까지 칼을 휘두르고 있다는 소리에 교태전을 나와 영빈에게로 향하던 중, 자지러지는 아이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뛰다시피 갔더니, 옷섶을 풀어헤친 미치광이 가 아기를 연못에 집어던지고는 후원 뒤쪽으로 후다닥 뛰어가고 있었다.

중궁전 최고상궁인 고상궁이 나인들을 독촉하여 연못에 던져진 아이를 바로 구했으나, 아기가 숨을 쉬지 않았다. 급박한 상황이라 중전이 몸소 아기의 등과 가슴을 시료하고 숨을 불어넣었다. 한참을 처치하고 서야 울음소리가 터졌다. 힘이 풀린 중전이 바닥에 풀썩 주저앉으면서도 품에 안을 아이를 놓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난 이찬은, 중전이 가슴으로 품은 아이가 되었다.


혜빈궁에 도착한 덕오가 함유당에 다녀온 일을 고하던 중, 이나인 단지가 그림 속 박상궁의 미색에 놀라움을 표하자, 혜빈이 얼굴을 굳히면서 필요 없는 내용을 고한다는 호된 꾸짖음과 회초리를 들이라 명한 후, 몸소 단지의 종아리를 쳤다. 놀란 최상궁이 아랫 궁인 단속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다고 연신 읍하였으나, 혜빈의 매질은 계속되어 회초리가 부러지고 단지 종아리에서 피가 터졌다. 혜빈이 이성을 잃고 이나인을 직접 단속을 하였다. 함유당의 미색을 섣불리 꺼낸 단지의 실책에, 혜빈이 심중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지는 혜빈 처소의 심복인 아이였다. 장차, 혜빈궁 지밀을 이끌 나인이었고 세손의 후궁인 덕오의 절친한 동무였다. 평생을 궁에서 지낼 나인들에게 동무는 혈족과도 같은 존재이다. 혜빈의 처사가 도를 넘었다.

중전이 함유당에 자주 걸음 하시니, 신경이 곤두 설 일이기는 하나, 분명한 투심이었다. 여염집 아녀자들처럼 부군에게 아련하신가. 폐세자는 은애 하는 마음을 받을 자격이 있으신가. 혜빈이 회초리를 직접 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덕오 마음에 깊은 분노가 일었다.


임오년의 일들을 어찌 말로 다 하리오. 덕주를 무참히 잃고 궐 안팎으로 원수를 찾아다녔으나 손가락들이 가리키는 끝은 언제나 경춘전이었다. 조선의 국본이었던 폐세자는 개망나니 칼에 목이 베여 저자에 던져져도 시원찮을 자였다. 사람의 목숨을 신념도, 명분도 없이 그저 분풀이로 취하였다. 비단옷 입고 귀히 자랐으나, 아비인 임금에 대한 분노를 힘없는 이에게 분풀이하던 저열한 인사. 그리 뺏은 목숨이 백여 명이 넘는다며 이야기를 들려주던 궁인들 몇은 경춘전을 향해 침을 뱉기도 했다. 경춘전은 다음 보위를 이를 세손의 모친이 계시는 전각이었으나, 저주를 퍼붓던 궁인들은 세손이 폐위될 것을 의심치 않았다.


미치광이라 다른 이의 목숨을 그리 하찮게 거두었는가. 약한 이를 업수이 여기는 천성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가 세손의 아비였고 혜빈의 부군이었고 임금의 아들이었다. 경춘전을 경멸하고 덕오에게 위해를 가하는 수많은 궁인들을 참아 낼 수 있었던 건, 혜빈이나 세손이 그 광인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헌데, 연심이라. 그런 이를 지아비로 둔 것은 혜빈의 잘못이 아니나, 그런 이를 마음에 품은 건 혜빈의 잘못이다. 회초리질하는 혜빈의 모습을 더는 보지 못하고 시선을 서안에 두었으나, 화가 난 거친 숨을 숨길 수는 없었다. 부러진 회초리를 내던진 혜빈이 덕오만 남기고 모두를 물렸다.


“내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것이냐. 표정이 그게 무엇이냐”

거칠고 날카로운 말이 덕오를 향했다.

분노한 마음을 표해서는 안 된다. 덕오는 숨을 참으며 찬찬히 혜빈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고했다.

“중전께서 은전군을 보살피는 모양을 살펴주소서”

“무슨 말이더냐”

낙성대감의 서자 얘기를 꺼냈다.

“사가의 언니가 조카를 보살피는 것과 꼭, 같았습니다”

더는 고하지 않았고, 혜빈도 묻지 않았다.


금상께서 세손을 극진히 아끼시어 세손의 서형제들을 깊이 경계 하시나, 내전이 어미 잃은 왕손을 아끼는 것만은 못 본 척하였다. 늙은 왕에게 시집온 어린 계비가 불행한 왕손에게 마음을 붙이고 있으니, 지아비 된 처지로, 탓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중전을 뒷배로 성장하고 있는 왕손 이찬은 세손과는 한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처지가 될 것이다. 이찬은 역모의 주인이 될 것이다. 영특하기가 그지없는 혜빈이다. 세손의 그 좋은 머리는 혜빈에게서 온 것이었다. 마음보다 머리가 먼저 움직일 것이다. 세손이 그러하듯. 중전이 은전군을 보위에 올리려 할 것을 방비하는 것이 시급한 일임을 상기시킨 덕오는 격앙된 혜빈의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혜빈이 긴 눈썹을 아래로 내리고는 미동이 없었다. 얼마를 그리 있었는지 덕오 다리가 저렸다.


제 처소에 든 덕오는 배신감에 열이 끓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폐세자에 대한 혜빈의 마음을 헤아려 본 적 없었다. 어린 나이에 국혼으로 맺어진 지아비였고, 자식이 있으니 그저 감내하며 살았다고 생각했다. 금수보다 못한 이가 정인이기도 했었나. ‘투심 때문이었구나. 박상궁을 그리 미워했던 것이’ 생각이 이에 이르자, 이부자리를 걷어차고 연무장으로 쓰는 뒷마당으로 나가 쇠뇌를 들었다.

‘그저 여염의 여인이었구나. 그런 이를 믿고 목숨을 어찌 보전하여, 덕주를 해한 놈을 찾아 칠 것인가’

손톱 끝에 피가 베일 때까지 살을 날리다 과녁을 노려봤다. 귀한 목숨 지키라고 서갑아재가 공들여 만들어준 쇠뇌에 살기를 담아 끝도 없이 날렸다. 연마용 살들을 모두 날리고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노리개인 양 가지고 다니는 침낭 속 침 모양 살들도 모두 날려, 과녁 정중앙은 고슴도치 등 마냥 빼곡하였다. 이지러진 달은 덕오를 달래주지 못하고, 살기 어린 쇠뇌 살들만 비추고 있었다.


아버지 등에 업혀 입궁하던 날. 태어나 그리 말 많은 아비를 처음 보았고, 어렵기만 했던 아비 등에 얼굴도 붙여 봤다. 청지기라고 하나 양반가의 사내가 열 살 된 여식을 업고는, 북촌 그 긴 길과 광통교 밑을 지나 궐문 앞까지 한 번에 내리 걸었다. 길 가던 양반들이 혀를 차고, 장옷 걸친 부인들이 놀라 쳐다봤다. 젊은 소저들 쑥덕거리는 소리며, 다리 밑 거지 아이들의 부러움에 찬 그 눈빛을 어찌 잊을까. 가는 내내 아비 등에 얼굴을 팍 붙이고 매미처럼 붙어었다. 그래서, 알았다. 아비 폐부에 그렁이는 울음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궁을 벗어나 살 방도를 찾아야 한다. 부귀는 시전에 있다. ’

‘혜빈을 믿지 말고, 세손 또한 믿지 마라. 작은 재물에 혹하지 마라 ’

‘하늘이 네게 준 명대로 살아야 한다.’


혜빈이 내어준 작은 가마에 태우지 않고, 직접 업어 입궁시킨 아비의 간절한 바램은 부적이 되어 가슴에 붙었다. 해서, 궁이 무섭지 않았다. 궐문 앞에 줄지어 서서, 첫 입궁을 기다리는 어린 소녀들의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여기저기 들렸으나, 덕오는 오직 해야 할 일 들만 새겨었다. 입궁 첫날을 떠올리며 쇠뇌를 날리던 마음을 다 잡았다. 복수, 뒷배, 돈. 그리고 영흥사 무당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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