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여치
#6. 여치
늦가을 여문 볕이 내당을 깊이 비추니 전각 안은 환하고도 따스하였다. 내장지문이 모두 닫히자 어수선하던 소리들이 잦아들며 분위기가 차분해졌다. 내실에 앉았던 연인들이 품계에 따라 차례로 세손에게 탄일 축하례를 올렸다. 덕오가 마지막으로 예를 갖춘 후 자리에 앉으니, 나인들이 화려한 칠기 소반을 내명부의 여인들 앞에 놓았다. 국수와 진연 음식이 올려진 값비싼 통영 반상을 혜빈의 내방에서 받으니, 내명부의 일원이 되었음이 실감되었다. 준비해 온 선물들을 올리라는 혜빈의 명이 있기도 전에 여나인이 일어나 제가 만든 탄일선물을 세손에게 보였다. 옷을 짓는 내내 어수선하게 하더니, 빛깔 고은 담적색 비단 도포를 지어 내놓았다. 반듯하게 잘 개어진 옷을 두 손 높이 들어 올리며 세손에게 눈웃음을 멈추지 않는 여우 같은 여나인 이었으나, 옷 땀에 스민 정성만은 진심이라 밀려오는 미운 감정을 어찌해야 할지 가닥을 잡을 수 없었다. 잠행 잦은 세손에게 긴할 것이니 제 마음을 눌렀다. 세손이 여나인을 향해 고마움을 표했다.
여나인의 돌출 행동에도 혜빈의 꾸짖음이 없었고, 당황한 빈궁이 청국에서 구한 귀한 서책을 급히 올렸다. 내명부 여인들이 세손을 지극히 섬기니 혜빈이 기쁨에 겨워 덕담을 연이으며 탄일연의 주인을 칭찬했다. 세손께서 저리도 강건하게 자랐으니, 어찌 자랑스럽지 않으실까.
넓은 이마에 콧날은 반듯하고 컸다. 길고 큰 눈, 꼭 다문 입매까지 그야말로 훤훤 장부였다. 밤늦도록 학문에 매진하고, 손에 잡힌 물집이 짓무르도록 활시위를 당기는 동궁이었다. 최정예 무관들을 이긴다는 말이 궁시장에서 흘러나왔다. 혜빈이 긴 덕담을 끝냈음에도 세손이 수저를 잡지 않고 서늘한 눈빛으로 덕오를 보고 있었다. 세손의 언짢은 기색을 눈치챈 여나인이 분위기를 바꿔보려 상에 올라온 음식들을 세손에게 이리저리 권하자 보다 못한 빈궁이 낮은 꾸지람을 내렸다. 정궁 앞에서 도를 넘긴 여나인은 못 들은 듯, 제 전각 안 떡갈나무에 찾아든 다람쥐까지 자랑하며 세손이 납시기를 청하였다. 세손과 빈궁이 합궁치 않으니, 여나인의 자신감이 대단하여 도를 넘고 있었으나, 웃전인 혜빈은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새앙머리 더냐"
덕오를 향한 세손의 날 선 물음에, 방안 분위기가 굳었다. 제 후궁에게 쪽을 지우지 않은 혜빈에 대한 불만을 담은 물음이었다. 상황을 눈치챈 덕오가 즉시 바닥에 엎드리며 읍하였다.
"보는 눈들이 많음을 헤아려 주소서"
"나를 업수이 여겨, 네 멋대로 모양새를 그리하고서는, 무엇을 헤아릴까"
탄일을 맞은 날, 거친 말투를 내뱉는 세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방이 간자다. 세손에게 궁첩이 줄줄이 있다고 떠벌리라는 것인가. 경춘전에 승은 입은 특별궁녀가 숨겨져 있음은, 모두가 아는 비밀이었다. 정궁에게서 후사가 없기에 드러내 문제 삼지 않을 뿐.
세손의 역정이 계속되어 덕오는 엎어진 채, 이마를 바닥에 붙여두며 죄인 모양새였다. 불편한 심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으나 세손은 방문을 걷어차며 나가버렸다. 엎드린 채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걱정이 만 가지로 일었다. 어려서도 우람한 세손이었는데, 성체가 된 몸은 돌덩이처럼 단단하였다. 그 강다리로 성질이 뻗칠 때마다 온 궐의 문들을 차고 다녀 문짝들이 남아나질 않는다며 말이 많았다. 전연사 소속 궁인들의 언사가 과하다 여겼더니 거짓이 아니었다. 저 불같은 성정을 고치지 않는다면 재목방의 강목들아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탄일연의 주인이 방을 나가버려 모두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기어이, 혜빈이 눈물을 보였다.
"어미 궁에서 조차 제 내자를 드러내지 못하는 처지가 답답하여 그러는 것이니, 모두들 이해하거라"
혜빈의 다독임에도 세손의 불같은 성정은 늘 두려운 감정을 일으켰다. 폐세자의 아드님이다. 그 광기를 이으면 어찌하나, 늘 경계심이 일었는데 저런 성정을 보노라니 하늘이 노래진 느낌이었다. 세손을 향한 애정과는 다른 감정. 두려움과 의심이 일었다. 빈궁이 있으시고, 여나인도 비단옷에 쪽을 지어 엄연한 승은궁녀임을 알리고 있는 자리였다. 혜빈이 저를 숨기는 이유를 잘 알고 있음에도 화를 누르지 못하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정성을 들인 자리를 저버렸다. 사소한 뒤틀림에도 화를 억제치 못한다면 보위에 오르더라도 폐주의 길은 자명하였다. 오랜 시간 공들여 내진찬을 준비한 혜빈의 상심을 생각하니, 세손에 대한 원망이 깊어졌다.
웃전의 별다른 하명이 없어, 다들 꼼작도 못하고 앉았는데, 세손이 씩씩거리며 다시 들었다. 소반에 놓인 국수는 이미 퉁퉁 불었으나 지금이라도 상을 물린다면 퇴선간 궁녀들이라도 맛나게 먹을 터인데,
‘왜 다시 오셨누’
불어 가고 있는 국수 때문에 화가 난 덕오가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날 선 물음이 날아들었다.
"성나인, 과인의 탄일 선물은 준비했는가"
설마 허니, 저의 선물을 받고자 다시 오신 것인가. 놀라 기가 찼으나, 목소리를 다듬으며 곡진하게 답하였다.
"예. 저하. "
여나인의 설레발에 미리 내놓지 못했지만, 정성을 들여 준비한 선물이었다. 세손의
성질머리에 골은 났지만, 준비한 선물은 직접 주고 싶었다.
"내어 보거라"
언짢은 말투로 세손이 거칠게 좌정하니 혜빈과 빈궁이 얼른 내어라 눈치를 계속
주니, 쭈뼛거리며 비단보를 세손께 올렸다. 마음을 다하긴 하였으나, 약소하여 부끄러웠다.
세 가지 선물을 준비하였다. 서갑아재가 만들어 준 은공예 노리개와 수놓은 영견, 고생하며 만든 동다회였다. 서갑아재에게 부탁하여 만든 은노리개가 귀여워 선추나 동다회에 달면 좋을 거 같아, 도포에 두를 다회를 꼬기 시작했는데 실이 삐져나오고 줄이 고르지 않아 엉망이었다. 몇 번을 다시 꼬아도 그 모양이라, 지켜보다 못한 상의원 궁녀 천이가 다시 만들어 주었다. 침선비답게 솜씨가 야무져 다행히 고운 다회가 완성되었다.
세손의 마음이 가라앉았는지 다회를 보며 기쁜 낮을 띄우며 노리개와 영견을 만졌다.
”이 노리개는 북두칠성 모양이구나. 뜻이 있는가 "
잘 만들어진 공예품을 대번 알아보며 하문하였다.
”예 저하. 하늘의 성수를 뜰 수 있는 노리개입니다 “
”은하수를 얘기하는 것인가 "
고개를 끄덕이며, 북두칠성을 만든 이유를 고했다.
”땅에 사는 백성은 작디작은 개천으로, 조금만 가물어도 흐르던 냇물이 말라 제 모양을 잃고, 큰비라도 오면 가느다란 물길은 터져버려 또, 제 본모습을 잃습니다. 저하께서 높은 곳에 계시니 세상을 두루 살피시다 천들이 말라붙으면 성수를 부어 흐르도록 하시고, 폭우 내려 얇은 천이 터지면 넘치는 물을 덜어 주어, 실개천들이 언제나 제 본 대로 흐르도록 살펴주소서. 은국자 칠성을 그리 사용해 주소서. "
북두칠성 모양 은노리개를 만지는 세손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부디, 만백성을 두루 살피고, 제발 성질도 내지 않는 성군이 되소서’
덕오가 제 마음을 눈빛으로 다시 고했다.
세손이 덕오에 눈빛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별자리 모양의 끝 파군성 모양을
바로 잡아 뺐다.
예리한 세손이다.
”은침이구나 “
목소리 끝에 물기가 묻었다.
”선추에도 달 수 있을 만큼 작은 것이니, 늘 소지하신다면 독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요긴하게 쓰일 것입니다 "
제가 준 것이 세손의 품 안에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을 전했다.
”하옵고, 일전에 난전에서 있었던 일로 제게 주신 영견이 더럽혀져, 새로이 영견을
만들며 수를 놓았나이다. "
세손이 영견을 펼쳤다.
둥그런 달 아래 들쭉날쭉 작은 돌틈 사이로 국화 한 송이가 탐스럽게 피어올랐다.
무성한 잎들 사이로 작은 여치들이 앉았고 국화꽃 위에는 제법 통통한 여치가 앉았다.
”국화는 저하입니다. 여치들을 보아주소서 “
”여치는 여인들이구나. “
영견을 함께 살피던 혜빈이 알아채며 말을 거들자, 빈궁과 여나인도 함께 영견을 보았다.
”예. 자가. 국화꽃 위에 앉은 여치가 마마 이옵니다. "
”그럼, 나는 여기에 붙은 것인가 "
빈궁이 국화 줄기대 잎사귀에 붙은 여치를 가리켰다.
”예. 빈궁 자가“
”자네와 나는 왜 이리 떨어져 앉았는가 "
여나인이 샐쭉 삐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떨어져 앉은 것이 아니고, 국화잎이 무성하니 널찍한 잎사귀에 내려앉은 것입니다 "
눈치 없으이. 그 긴 여우꼬리 어디 두고 예서 시샘을 내는가. 골을 내는 여나인 때문에 난감하였으나,
설명을 이었다.
”국화가 좋으니 모두가 노래하며 깊은 밤 정취를 즐기고 있습니다 “
덕오가 거듭 국화를 칭찬하였다.
”정취 좋고, 뜻 또한 깊으이 “
빈궁의 칭찬을 이었다.
세손의 목숨도 안위도 장담할 수 없으니, 투심과 연민이 함께하는 그네들이었다.
국화를 본 세손이 그 밤의 일이 기억난 듯 입매가 씁쓸하였다.
”예전에 저하께서 돌 틈에 난 국화를 보시며 하신 말씀이 있어, 저의 마음을
전하고자 수를 놓았나이다.
저하께서는 저희가 있음을 잊지 마소서 “
세손을 향해 정중히 고했다.
잎사귀들과 여치는 제법 모양새 있게 놓아졌으나, 조그만 둥근달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둥글지 않을뿐더러 바늘구멍이 숭숭하였다. 입으로 미사여구를 늘어놓고 있으나 덕오는 제가 놓은 자수 실력이 부끄러워 얼굴이 더웠다.
그 밤의 일을 위로하고자, 온전히 제 힘으로만 수를 놓았더니 저 모양이 되었다.
도움 받을 솜씨 좋은 궁인들은 많았으나, 달밤의 일을 남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뜻만 알리면 되지 싶어 배짱 좋게 만들어 바쳤는데,
막상 이리도 부끄러울 줄 몰랐다.
세손 눈가가 젖어와 덕오가 얼른 얼굴을 내렸다. 차마, 세손을 마주 보지 못하고
그저 ‘강건하소서’
간절한 마음으로 탄일을 축원하였다.
세손께서 금상을 뵙고 나오던 어느 날. 편전 앞마당에 무리 지어 있던 대신들의 노골적인 비난이 있었다.
자기네들끼리 하는 얘기인 냥 세손 들으라 큰소리로 폐세자 잘못을 들추며 동궁의
자격을 논했다.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 대꾸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이 두려웠노라 혜빈전에 와서 대공통곡을 한 날이었다.
어머니 앞에서 한참을 울고 난 세손이 덕오를 찾았다. 말없이 한참을 걸다 전각
마당에 핀 국화를 발견하였다. 둥근 달빛 아래 꽃이 더욱 어여뻤는데,
”돌 틈에 끼어 겨우 사는 것이, 내 처지와 같구나 “
울음 벤 목소리에, 감히 위로치 못하고 그저 그림자 뒤에 서 있었다. 그 밤 이후 훤한 달은 언제나 슬픈 얼굴로 덕오를 따라다니며 위로치 못한 그 밤이 내도록 아팠다.
”못난이 국화라도 곁에 이리 여치들이 앉아 쉬며 노래도 하고 있구나.”
“내가 어리석었다. 함부로 노여워하지 않도록 노력하마“
세손의 말에 감흥한 덕오가 부복하였다.
“돌멩이 틈에 난 것을 서러워 않고 부지런히 대를 뻗치며 꽃을 피울 것이다. 여린
여치들의 쉼이 되는 국화가 되고 만백성을 보살피는 군주가 것이다”
엎드린 덕오를 일으키며 세손이 힘주어 말을 이었다.
“쉬이 화내는 것을 고치도록 노력하마”
급한 행동을 반성하는 세손을 보며 안도하였다. 잘못한 것을 인정혀며 바로잡는다고 약조하였다.
세손을 믿을 것이다. 세손에게서 폐세자를 떠올리지 않을 것을 각오하였다.
”일월성신께서 굽어보시며 보살피고 계십니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저하. "
덕오가 세손을 위로하였다.
둥실한 달은 애달픔이 아니라 천지신명이시니, 슬픔 따위를 떠올려서는 안 된다.
마음을 가라앉힌 세손이 귀한 서책을 구한 빈궁에게 고마움을 표하더니 여나인의 옷 짓는 솜씨도 칭찬하고, 동다회도 곱다 하시며 은노리개를 다회 끝에 대어 보셨다.
침선비의 도움으로 만들었다 고했음에도
”덕오 손끝 여물어 다회도 이리 좋다. 영견에 놓인 수도 아주 곱다 "
삐져나온 수실이 눈에 훤히 보임에도 세손의 칭찬이 이어지자, 혜빈이 크게 웃고 시위하고 섰던 단지도 큭큭 거리다 최상궁에게 혼이 났다. 밝아진 방안 마음을 놓았더니, 난데없는 세손의 청이 이어졌다.
”다회를 매어 다오 "
난감하였다. 빈궁이 있는 자리였다. 못 들은 것인 양 앉았는데, 혜빈이 연거푸 눈짓을 주어 일어나 다회를 세손 허리에 둘렀다. 세손 몸체를 만지다 보니 난전에서의 서운한 감정이 일어 절로 다회 줄을 꽉 묶었다.
”그리 맨다고 숨이 막힐까. 왜 악심이누“
세손이 어이없어하며 퉁퉁거리자, 덕오의 마음을 알아챈 혜빈이, 난전에서의 일을
모두에게 알렸다. 싸움질로 얼굴이 붓고 온몸이 멍투성이로 채로 궁에 들어 몇 날을 앓았음을 얘기하자,
세손 행동에 날이 섰던 빈궁과 여나인의 얼굴이 풀어졌다. 꼬리 아홉 달린 혜빈의
여우구슬을 받아먹고 산다는 말이 돌 정도로 시어머니의 신임을 받는 덕오인데, 세손께서도 저토록 편애하니 미운 감정이 절로 앞서기는 하나, 덕오의 노고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여느 처첩들과는 처지가 다른 그들이었다.
임오년 이후, 세손은 밤에도 옷을 벗지 못하고 잠들었다. 위해를 가하는 무리들이 포기를 모르니, 보위도 목숨도 안전치 못했다. 세손이 목숨을 잃는다면 빈궁은 사약을 받을 것이고, 여나인 또한 죽어서 궁을 나갈 것이다. 혜빈궁 식구들은 매사 경계하고 조심하였다. 시어머니 혜빈은 경춘전에 두려움이 깃드는 것을 용납지 않았다. 금상의 마음을 얻는 일과 세손의 안위를 위해 무엇이든 하였고, 그런 혜빈을 위해 제 몸
아끼지 않고 양으로 음으로 움직이는 덕오였다. 어려서도 궁안의 만 가지 일들을
재빠르게 알아내는 재주를 부리더니, 지금은 눈이 더욱 깊어져 속내를 알 수 없었고 배포까지 늘었다. 원래도 어여뻤던 아이였는데 자랄수록 더 출중해졌다. 배움 또한 혜빈의 탄복이 터질 정도로 빠르고 깊었다. 덕오는 후궁의 길을 가지 않고 충직한
신하로 살고자 하는 듯하였다. 그러니 서로 다감한 눈으로 바라보는 저들에게 투심을 일으켜서는 안 될 것이다. 빈궁과 여나인은 마음을 다 잡았다.
다회를 다 맨 후, 삐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새침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덕오를 향해 세손이 작은 딱밤을 내렸다. 범개를 다독여야 하는 부군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은
서운함에 내린 딱밤이었으나 , 덕오의 하얀 이마가 이내 벌게 지자, 놀란 세손이 ‘호’ 하고 이마에 바람을 넣으며 애정을 한없이 드러내었다.
시전 싸움질로 온몸에 멍이 든 저를 두고, 밤이 새도록 범개와 술독에 빠진 그 일은 생각할수록 분통이 났으나, 무종이에 대한 일로 고마움도 많았다. 무종 아비의 죄를 물어 은광으로 보냈고, 아비가 광산에서 일한 노임은 가족에게로 보내라는 명이 내려졌다. 무종이 또한 궁비로 허락해 주어, 덕오는 똘망한 아이를 얻었다.
국수상이 새로 들어오며 그들만의 탄일 진찬이 이어졌다. 세손의 명운이 면가락처럼 길기를 기원하며, 면이 끊어지지 않게 조심히 감아 먹었다. 입이 짧은 덕오지만, 상에 올라온 음식들을 조금씩 모두 먹으며 복을 기원했다.
세손께서 경춘전에 보름이나 더 머무시어, 세손 수발드느라 덕오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늦도록 침수도 들지 않고 학문에 임했고 첫새벽에 깨어 무예를 연마하였다. 후궁의 예를 다하라 명하시니, 초조 수라부터 망건 꿰는 것까지 시중드느라 힘들고, 빈궁과 여나인 눈치까지 보느라 죽을 지경이어서 세손 큰 궁으로 가시는 날, 기뻐 눈물이 났으나 혜빈께서 아드님 보내는 것이 서운하여 눈물을 참지 못하시니 눈치껏 침울한 기색을 내긴 하였으나 며칠을 몸져누웠다.
세손께서 북두칠성 노리개를 만든 육서갑을 만나고자 하시니, 아재에게 세손의 칭찬을 직접 전하고 싶은 마음에, 아픈 몸을 추스르자 바로 아재네 공방으로 움직였다. 서갑아재는 봇짐장수로 떠돌다 우연히 김우흠의 목숨을 구해준 일로, 도성 안 목 좋은 곳의 공방 주인이 되었다. 사람을 쉬이 믿지 않는 김우흠의 신임이 깊어 덕오의 비밀무기까지 만들고 있었다.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내니 절로 입이 벌어지는 재주였다. 아재의 내자 소안댁 역시 따뜻하고 인정 많은 사람이라 덕오는 서갑아재네가 제 식솔들처럼 그저 좋았다.
궁에서 만든 유과와 시전 음식들을 사들고 부지런히 걸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다섯이라 금방 동날터이다. 아재네 식구들이 반겨줄 생각을 하니 발에 힘이 붙어 뛰듯이 내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