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였지만, 나는 바쁨을 먼저 이해했다
어릴 적 아침, 엄마와 아빠에게 전화를 걸면 흔하게 반복되던 대화였다.
그때의 나는 지금 당장 친구랑 햄버거를 먹으러 가도 되는지, 주말에 놀자고 했는데 가도 되는지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했다. 지금의 어른이 된 내가 보면 정말 별것 아닌 일들이지만, 열 살도 안 된 아이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건 하루의 기분을 좌우하는 문제였고, 괜히 혼나지 않을지 고민해야 하는 일이었으며, 무엇보다 혼자 결정하기엔 너무 큰 선택들이었다.
때로는 학교가 끝난 뒤 어디로 가야 하는지 확인하고 싶을 때도 있었고, 그냥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학원인지 집인지 아니면 큰집인지, 아침에 분명 설명을 들었는데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괜히 불안해지는 날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며 혼자서 판단해야 했다. 전화를 걸어야 할 만큼 급한 일인지, 아니면 그냥 학원으로 가면 되는 일인지를.
그렇게 하루 이틀을 겪다 보니 자연스럽게 데이터가 쌓여갔다. 아침 9시에서 10시 사이는 전화하면 안 되는 시간이었고, 점심시간이라고 해서 항상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후 2시쯤은 괜찮을 때가 많았지만 가끔은 그때도 회의 중이었으며, 저녁 6시가 넘어야 비로소 여유 있게 통화할 수 있었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었다. 전화를 했다가 할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끊긴 순간들이 마음속에 한 획씩 그어질 때마다, 나는 스스로 그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걸 배워갔다. "나중에 전화할게"라는 말은 종종 지켜지지 않았고, 나는 그것마저 이해하려 애썼다. 부모님도 바쁘고 피곤하니까 깜빡할 수도 있는 거라고.
어린 나는 몰랐다. 회사에 데일리 미팅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상사와 대화 중에는 쉽게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점심시간에도 업무 관련 식사 약속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이해하려고 애썼다.
전화기 너머에서 엄마와 아빠는 나에게 짜증을 낸 적도 화를 낸 적도 없었다. 오히려 목소리에는 늘 미안함이 묻어 있었다. "엄마가 오늘은 꼭 빨리 갈게" "아빠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그 말들은 전화를 끊은 뒤에도 오래 귓가에 남았다.
신기하게도 나는 애타는 부모님의 마음을 읽어낸 것 같았다. 회사에서 마음대로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사랑하는 자식에게 소홀해질 수도 없었을 그 애타는 마음을. 전화를 받고 싶지만 받을 수 없고, 아이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지만 빨리 끊어야만 하는 그 미안함을.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부모의 바쁨을 이해하게 되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때로는 내가 상처받는 순간에도 마음껏 감정을 쏟아내기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이해를 먼저 하게 되었다. 그건 배려라기보다는 어쩌면 일종의 생존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 상황을 이해하는 쪽이 덜 상처받는 방법이었으니까.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 일보다 타인의 사정을 먼저 생각하게 된 게. 섭섭해하기 전에 상대방의 상황을 먼저 헤아리게 된 게. 전화 한 통을 걸기 전에도 "지금 괜찮을까"를 먼저 고민하게 된 게.
지금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 때면 나는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한다.
아침엔 출근 준비로 바쁠 테고, 점심엔 밥을 먹고 있을 테고, 저녁엔 퇴근길이거나 저녁 식사 중일 테니.
괜찮은 시간이 언제일지 계산하다 보면 결국 전화를 걸지 못하고 문자를 보내는 날도 많다.
전화하면 안 될 것 같은 시간은 그렇게 내 안에 남았고, 나는 조금 일찍 애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때의 나에게, 그리고 언젠가 만날 나의 아이에게 전하는 편지>
그때 너는 전화를 걸기 전에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많이 망설였지.
괜히 방해하는 것 같아서, 혹은 지금은 안 될 것 같아서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곤 했지.
그때의 너는 혼자가 아니었어.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길었을 뿐이지, 사랑이 없었던 건 아니야.
엄마와 아빠는 늘 바빴지만 너를 잊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고, 마음을 내려놓은 적도 없었어.
다만 그 마음이 늘 말과 행동으로 동시에 도착하지 못했을 뿐이야.
그리고 이 편지를 읽는 네가 언젠가 만날 나의 아이라면, 이건 나의 부탁이자 약속이야.
확인받고 싶을 때는 망설이지 말고 불러줘.
바쁜 날도 있겠지만, 나는 네가 부른 걸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고 노력할 거야.
너는 기다림으로 사랑을 증명해야 하는 아이가 아니라, 존재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사랑받고 있는 아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