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그때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눈치를 배운 그 날.

by 작가 희와이

아이의 마음은 왜 그렇게 말랑했을까. 아직 다 자라지 못해서였을까. 그 시절에 스쳐 지나간 말 한 마디는 생각보다 깊이 박혀 쉽게 빠지지 않는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흐려진다고들 말하지만, 어떤 장면들은 그렇지 않다. 마치 콘크리트가 다 굳기 전, 누군가 무심코 밟고 지나간 자국처럼 형태를 남긴 채 함께 굳어버린다.


나는 어린이집에서도, 유치원에서도, 학원에서도 대부분 가장 늦게 집에 가는 아이였다.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 덕분에 누군가는 항상 나를 ‘조금 더’ 맡아줘야 했다. 그날도 그랬다. 같은 반 친구 어머니가 운영하던 미술 학원, 수업이 끝난 뒤에도 아이들을 돌봐주는 곳이었고 나는 그 공간이 꽤 익숙했다.


원래는 오후 여섯 시쯤 아빠가 나를 데리러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뭔가 달랐다. 원장 선생님이 급하게 전화를 받더니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아… 아버님, 걱정 마시고요. 잘 다녀오세요.”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기다려야 하는 날’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날따라 다른 아이들은 유난히 일찍 돌아갔고, 학원은 빠르게 조용해졌다. 원장 선생님은 사정이 있다며 나를 젊은 단발머리 선생님에게 맡기고 퇴근했다. 교실에는 나 혼자 남았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긴 연휴를 앞둔 날이었거나 금요일 저녁이었을 것 같다. 어른들이 가장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날. 시간이 조금 흘러 삼십 분쯤 지났을까, 선생님의 남자친구가 학원으로 들어왔다. 교실에는 나, 선생님, 선생님의 남자친구. 이렇게 셋만 앉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아마 데이트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 야간 수당도 없는 시간에 아이 하나 때문에 남아 있어야 했던 상황이었다. 또 한 시간이 흘렀다. 선생님은 원장실로 가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고, 나는 교실 밖에서 들려온 그 한 마디를 들어버렸다.


“와, 전화도 안 받고 애만 두고… 친부모 맞아?”


그 말은 누구에게 들리라고 한 말도 아니었고, 나를 향해 던진 말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원래도 보이던 눈치를 나는 몇 배로 더 보게 되었다. 조용히 앉아 있었고 괜히 숨도 작게 쉬었고, ‘내가 여기 있어서 미안하다’는 마음을 말로 배우기도 전에 몸으로 먼저 배웠다.


조금 뒤 아빠가 헐레벌떡 학원으로 들어왔다. 연신 사과를 하며 나를 안고 데려갔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날 만삭이던 엄마가 탄 택시가 뒤에서 들이받히는 사고를 당했고, 응급실로 실려 가는 상황이었다는 걸.


선생님은 몰랐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어린 이십 대 초반의 어른이었을 테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모두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다. 직접 화를 내지도 못한 채 뒤에서 짜증을 삼켜야 했던 선생님의 마음도, 병원에 가면서도 여기저기 사과를 해야 했을 부모님의 애타는 마음도, 그리고 그 가운데서 마치 내가 잘못한 것처럼 눈치를 봐야 했던 아주 어린 나의 마음도.


그날 이후로 학원에 오래 남아 있어야 하거나 친척 집에 잠시 맡겨지는 상황이 오면 아무도 나에게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자연스럽게 주눅이 들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은 늘 좌불안석이었다. 아마 어려서 더 그랬을 것이다. 말 한 마디의 무게를 아직 걸러낼 힘이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그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어른들도 감정이 있고 순간의 감정으로 말을 하기도 한다는 걸. 그 말이 네가 미워서가 아니라 각자의 사정 속에서 흘러나온 말이라는 걸. 그러니 말 한 마디에 너 자신을 작게 만들지 말라고. 너는 그 자리에 있어도 되는 아이였다고.


<그때의 나에게, 그리고 언젠가 만날 나의 아이에게 전하는 편지>

혹시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괜히 스스로를 작게 만들고 있지는 않니.

네가 거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시간을 빼앗는 것 같고,
숨을 크게 쉬는 것조차 조심스럽지는 않니.

괜찮아.
너는 그 자리에 있어도 돼.

어른들이 바빴던 건 네가 미리 이해해야 할 일이 아니었고,
어른들의 짜증은 네가 책임져야 할 감정이 아니었어.

그날의 말 한마디는 네가 잘못해서 나온 말이 아니었고,
네가 미워서 던져진 말도 아니었어.
그러니까 더 조용해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미안해할 필요도 없어.

부디 기억해줘.
너는 아무 설명 없이도 그 자리에 있어도 되는 사람이라는 걸.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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