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철이 없었다. 계산기도 두드려보지 않고 아무 준비도 없이 덜컥 미국으로 유학 왔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기대나 동경 따위는 없었지만, 그 당시 쉽게 얻을 수 있는 유학 정보는 미국이나 캐나다가 대부분이었다. 그중에서도 미국은 캐나다에 비해 학교 선택폭이 넓었고, 갓 결혼하여 짝꿍과 같이 유학을 해야 했던 나에게 두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킬 만한 곳은 미국밖에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야망 없는 인간인 나는 유학해서 대단한 무언가가 되겠다는 포부는 애당초 없었다. 그저 이 공부를 통해 나란 존재가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그리고 공부가 끝나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 정도 품고 있었다. 참으로 낭만적인 발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낭만은 필연 개고생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석사과정 1년을 지나면서 나의 낭만도 사그라들었다. 미국 생활도 잘 적응하고 있었고 공부도 무리 없이 잘 해나고 있었는데, 어느 날엔가 이 공부로는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기도 힘들뿐더러, 나 자신을 괜찮은 인간으로 바꾸기도 힘들다는 회의감이 몰려왔다. 그러던 차에 룸메이트는 타주로 박사과정에 들어가게 되었고, 나는 배우자와 떨어져 롱디를 하고 싶지 않다는 좋은 핑계를 대며 공부를 접고 함께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 험난하고도 무료하기 짝이 없는 유학생 배우자로서의 삶, 취업도 할 수 없고 공부도 할 수 없는 이른바 시체 비자 소유자로 10년을 넘게 살아갔다.
흙수저들이 대책도, 겁도 없이 유학을 왔기에 십 년이 넘는 유학생활 동안 차곡차곡 모은 것이라곤 카드빚과 뱃살, 그리고 유일하게 긍정적인 결과물인 아이들. 내 삶은 어디로 가는 걸까.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며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가운데서도 이따금씩 끝도 없이 밀려드는 불안감이 내 심장을 짓눌렀다. 이렇게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내 삶은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리는 건 아닐까. 수년 동안 녹슬어 버린 머리로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불안과 고민 속에도 시간은 흘러 흘러 마침내 나의 룸메이트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고, 드디어 우리에게도 미국 살이 십여 년 만에 이 나라에서 합법적으로 노동을 할 수 있는 신분이 주어졌다. 나는 노동허가증이 나온 직후부터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성실하게 모아 온 카드빚을 하루라도 빨리 털어내려면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취업을 위해 백만 년 만에 이력서라는 걸 써본다. 이력서를 앞에 두고 나는 나의 사회 경제적 가치와 쓸모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도 과연 돈이라는 걸 벌 수 있을까. 지금부터 뭘 해야 최소한의 밥벌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미국 학위도 없고 경력도 변변찮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뭐가 있을까.
자아실현 따위는 사치스러운 목표일 뿐. ‘빚에 눌린 삶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려면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가 현재 나의 목표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기 시작했다. 아무 데나 한 군데는 걸려라.
그러던 중, 우체국 임시직 모집광고를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