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 대의 스타트업 생존기 2
영어 이름을 쓴다고요?
“로렌은 안 됩니다. 이미 있는 이름이거든요.”
“네? (속마음 : 10년 넘게 쓰고 있는 영어 이름인데요.)”
“다른 걸로 정하세요.”
첫 스타트업으로 이직했을 때 나눈 첫 대화 입니다. 출근했더니 영어 이름부터 하나 정하라고 하더군요. 대학생 시절에 영어회화 교양 수업에 우연히 골랐던 로렌이라는 영어 이름을 10년을 넘게 써왔는데, 이미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다른 거로 정하라고 하더군요.
아무리 영어 이름이지만, 제 이름처럼 오랜 기간 사용했던 터라 쉽사리 다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더군요. 게다가 겹치지 않게 골라야 한다니 마치 미션같이 느껴졌습니다. 순간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길을 잃은 앨리스가 떠올랐습니다.
“혹시 앨리스도 있나요?”
“없어요. 앨리스로 하시죠!”
“그럼 앨리스로 할게요.”
이렇게 저는 그날부터 로렌에서 앨리스가 되었습니다. 영어 이름 하나 바꿨을 뿐인데 마치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서 쓰거나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앨리스의 삶이 펼쳐지는 듯했습니다. 낯선 스타트업 용어들도, 처음 사용해야 하는 프로그램들이 저를 길 잃은 앨리스처럼 당황하게 만들더군요. 역시 가수가 제목따라 가듯이, 사람은 이름 따라 가나 봅니다.
이렇게 스타트업에서 영어 이름을 쓰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닙니다. 아니, 매우 흔한 일이죠. 스타트업 채용공고를 보면 대부분 적혀 있는 게 ‘수평적 조직문화’입니다. 영어 이름을 쓴다거나 이름에 ‘님’을 붙여서 부릅니다. 더해서 직급, 직책을 전부 없애고 모두가 수평적인 조직 구조 안에 있어 보다 빠르고 합리적인 소통을 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요.
신기하게도 서로 영어 이름을 부르게 되면 부장님, 차장님 등으로 부를 때보다 보다 편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되긴 합니다. 1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도 서로 영어 이름을 부르게 되면 어느새 나이 차이는 사라지고 사람만 남아서 서로 편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되더라고요. 워낙에 스타트업은 나이를 묻지도 미리 말하지도 않는 문화라 서로 나이를 가늠만 하지 알 수는 없지만요. 대략적으로 직급이 많이 차이 나는 관계에서도 소통할 때 의견 피력이 좀 더 쉬워지긴 합니다. 대표에게도 영어 이름으로 부르거든요. 그래서 띠동갑이 넘게 차이가 나는 구성원과도 친구같이 지낼 수 있어서 즐겁게 회사 생활을 했어요. 정말 직급, 직책을 없애고 나이도 서로 모르고 사람 대 사람으로만 만나게 되다 보니 어느새 더 빨리 가까운 사이가 되더라고요.
이건 유정 님같이 님문화를 사용하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에게도 '○○님'이라고 부르는 문화를 가진 스타트업도 많거든요. 어떤 스타트업은 님조차 붙이지 않고 유정! 이런 식으로 이름을 서로 부르기도 하더라고요. 제가 다닌 곳 중엔 없었지만요. 진짜 이름을 서로 막 부르는 건 저도 적응이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영어 이름은 별명 같은 느낌에 원래 그렇게 부르는 게 익숙하니까요. 친구가 아닌 이상 나를 이름만 부를 경우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영어 이름을 부르고, 유정 님이라고 해서 마냥 마음 편하게 의견을 내놓을 수는 없더군요. 서로 다른 직군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프로덕트(온라인 제품이나 오프라인 제품 등을 이렇게 부릅니다)를 만들어 내야 하는 시스템이 대부분인 스타트업에서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걸 서로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말한 애플은 정말 실존하는 사과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군가는 브랜드로, 어느 누군가는 아무 의미 없는 단어로도 인식할 수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수평적인 구조로 일한다고 해서 다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다른 환경에서 다른 프로그램을 쓰고, 다른 직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와 언어로만 형성된 세계가 펼쳐집니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의 기획, 서비스 기획자가 만드는 기획, 개발자가 받아들이는 기획, 디자이너가 요구하는 기획은 전부 다 다른 기획이니까요.
단순히 서로 영어 이름을 사용해서 수평적으로 소통하면 효율적인 소통이 될 것이라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수평적으로 소통하는 것과 효율적인 소통은 완전히 다른 문제거든요. 타인을 나와 동등하게 놓고 존중하는 것 동시에 타인의 배경과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동반되어야 제대로 된 소통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죠.
똑같은 말을 하는데도 서로 이해하는 바가 다른 경우가 많은 요즘, 호칭만이 좋은 소통의 키는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부쩍 많이 듭니다. 보다 많은 걸 이해하고 알아가고, 보다 훌륭한 소통을 하는 스타트업의 구성원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시작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