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02. 빛 없는 낮
약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너의 아침을 깨워. 봉지 속 연한 빛의 알약 몇 개가 햇살보다 밝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식의 상념이 좋지 않다는 걸 잘 아는 너는, 주저 없이 몇 모금의 물과 함께 알약을 삼켜.
삼키는 일은 어렵지 않아. 예전보다 약의 개수가 준 덕분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익숙해졌기 때문일 거야. 온갖 것들을 삼키며 살아온 네겐 알약 몇 개를 삼키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마음에는 약효 짧은 안도감이 아주 천천히 깃들어. 이것으로 삶은 하루 더 연장될 테지.
텅 빈 약 봉투를 쓰레기통에 내던졌는데 이상하게 비닐 쪼가리의 무게감이 손에서 떠나질 않아. 여전히 무거운 하루로, 아직도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는 자책감으로, 마치 정전기처럼 끈질기게 따라붙어.
시간이 흐르면 아침은 더욱 선명해지는데 새벽의 서늘함과 밤의 냉정함은 계속해서 남아, 몸과 마음을 물 먹은 솜처럼 가라앉혀. 결국 알약도 해결하지 못하는 감정을 끌어안고 하루를 시작하지.
해묵은 감정과 가벼워지지 못하는 삶의 무게가 이어지는 하루. 네가 견디고 있고, 나 또한 견뎠던 시간들.
나는 우리의 그런 시간을 ‘빛 없는 낮’이라고 불러.
조금 걱정돼. 이 글이 네게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까. 실망할까, 아니면 체념할까. ...내 자신, 너를 내가 아직도 이렇게 모르는구나, 한심하게.
먼저, 이 글을 쓰는 시점이 되면 넌 아무것도 삼키지 않은 채로도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돼. 영원히 환자로 살아야 할 것 같다는 불안에 시달렸던 네가, 온전하고 평범한 일상을 되찾은 셈이니 무척 기쁠 거야.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생각보다 달라진 게 없다는 걸. 그저 약 개수와 섭취 횟수가 물리적으로 줄었을 뿐 모든 게 여전하다는 거.
네게서 “약이 줄었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안도하고 축하해 줄 거야. 그 말은 "우울증이 좋아지고 있다"는 말보다 이해하기 쉽거든. “많이 좋아져서 다행이야.” 네가 그들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이면 대부분의 대화는 거기서 끝나. 그럴 때마다 견뎌 온 모든 시간이 간단히 끝나버리는 것 같아 허무해지기도 할 텐데 그런 것 하나하나에 너무 실망하지는 마.
너의 안부는 더 이상 그들에게 조심스러운 질문이 아니게 돼. 그 시점이면 넌 ‘괜찮아진’ 사람이거든. ‘괜찮아졌으니까’ 다시 바빠져도 되고, 예전처럼 성실해야 하고, 똑같이 밝은 사람. 결국 괜찮은 사람 취급을 받을수록 더욱 가라앉는 아이러니에 너는 또 마음을 다치겠지.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미련하게 견디지 말고 가방이나 파우치, 지갑에 미리 넣어 둔 비상용 약을 바로 꺼내는 걸 추천해. 손에 쥔 채 들여다보기만이라도 해 봐. 삼키지 않아도 견딜 수 있다는 확신을 느낄 때까지. 도저히 안 되겠으면 삼키면 그만이야. 그러면 견딜만해질 거야.
그래. 삼켜야 할 것, 묵직한 하루, 그늘진 상념, 생채기 난 마음. 결국 모든 게 여전할 거야. 여전히 빛 없는 낮을 살아가야만 해.
무엇보다 약이 줄어들었다고 삶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더라. 생각해 봐. 손바닥을 가득 채울 수준의 약을 삼키던 날에도 무겁던 게 그리 간단히 가벼워질 리 있겠어? 여전히 삶이 버겁고 힘겹다는 걸 남에게 들키지 않는 데 익숙해질 뿐이야.
자살이 아닌 생존을 선택한 결과라던가, 우울증이 지나가고 난 이후의 삶, 알약을 삼키지 않는 아침, 엔딩 그 너머의 세상, 그런 게 궁금했던 적은 없었어. 막연히 상상만 했을 뿐이야. 우울이 사라지고 나면 세상 모든 게 아름답고 멋져 보일 거라고.
그런데 겪어 보니 우울의 종말은 행복이 아니었어. '그리하여 행복해졌다'는 결말은 동화 속에만 존재했고, 결말 너머의 현실을 살아가려면 삶의 여전한 지점들을 마주 봐야 했어. 그 누구도 그런 걸 알려주지 않았어. 직접 깨우치는 게 최선이었지, 안타깝게도.
지금부터 들려줄 이야기가 어쩌면 네겐 버겁고 힘겨울지도 모르지만.
나는 우리의 삶에 구름이 걷히고 빛이 스미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올 거라고 믿고 있어. 그게 비록 이 생의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이 글이 우리를 그 순간까지 이끌어 주길 바랄 뿐이야. 삶의 무게를 견딜 힘이 되길. 빛 한 점 없는 낮에 드리운 구름이 사라지는 그 찬란한 순간, 고개를 들 원동력이 되길. 그리하여 여전하고 또 여전할 삶 속에서도 우리가 사라지지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