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03. 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간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몸부림이었어.
찌꺼기처럼 삶 곳곳에 유영하는 불안과 우울을 건져내기 위하여. 침전된 상태를 벗어나 그 어떤 안온한 삶을 누리고 싶어서. 사실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잘 살아내고 싶어서.
그렇게 매 순간 애쓰며 살았지만, 나는 너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손을 내민 적이 없었지. 침전돼 있던 너를 거기에서 건져내야 했었는데, 끝없이 생겨나는 상념을 걸러내는 것에만 신경을 썼어. 나약함을 질책하고 타박하는 것에만 매달렸어.
어리숙한 나라서, 너를 오랫동안 거기에 혼자 내버려 둬서, 미안해. ...미안.
유행하는 방식대로 사람의 성향을 판단형(J)과 인식형(P)으로 나눈다면, 우리의 성향은 후자일 거야. 하지만 실제로는 지나치게 계획적으로 살았어. 일상을 지키기 위한 계획을 만들고 틀어지지 않게 하려고 끝없이 애를 썼지.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고 운동하고 약을 먹는 소소한 습관이 일상의 여러 영역으로 번졌어. 근무시간 한 시간 전까지는 반드시 출근해야 직성이 풀렸어. 남들 눈에 흐트러져 보일 만한 일은 어떻게든 만들지 않으려고 아무 문제없는 것들을 반복해 확인한다거나. 하루의 루틴이 조금만 틀어져도 괜히 마음이 불안해져 다시 순서를 맞추려 들었지. 잠들기 전, 하루 동안 지켜낸 것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빠진 건 없는지 확인하다 밤을 새기도 하고 한밤 중에 회사로 돌아가기도 하고.
계획 아래 살아가는 일이 성향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루틴에 맞춰 살려고 몸부림치는 거, 그게 얼마나 깊은 강박인지 아니?
우울을 자각하고 치료를 시작했을 무렵엔 그런 증상이 더 심해졌었어. 누군가는 일상이 무너지기도 한다던데... 아닌가, 이것도 일상이 무너진 거라고 봐야 할까.
그렇게 살아야 ‘정상’처럼 보일 것 같아서 그랬어.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으려면, 우울을 들키지 않으려면, 밝은 사람으로 여겨지려면, 단단해 보이려면, 주변을 밝게 만드는 사람으로 남으려면, 그리하여 괜찮고 멋진 사람으로 존재하려면.
방법이 없었어, 그것 말고는. 강박이고 집착이었지. 물리적인 상해 없이 벌이는 자해였고.
불안과 우울을 삶의 오점으로 여겼어. 이 찌꺼기를 모두 걸러내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 믿었지. 우울을 모두에게 숨겼던 이유도 그래서였어. 이것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비밀로 영원히 남기를 바랐어. 나약함을 증명하는 것보다는 평범함을 가장하는 편이 나으니까.
그렇게 완성된 거야. 남에게 보이기 위해 만든 얼굴, 견고한 모래성 같았던 너와 나의 페르소나가.
치료가 종결됐다는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네. 다음 예약은 더 이상 잡혀 있지 않아. 비상시를 대비해 수면제와 신경 안정제를 처방받기는 했지만, 그중 정기적으로 복용해야 하는 약은 하나도 없어. 몇 알 정도 먹긴 했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고. 생각보다 안 찾게 되더라.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없어도 되더라.
그래, 정말로 끝났어. 긴 터널이었지. 오랜 새벽이었고.
여기는 평온해. 심지어 예전보다 불규칙적인 일상을 살아도 마음이 잔잔해. 숲을 흔드는 바람도, 바다를 일렁이게 하는 파도도 없어. 모든 순간이 고요해. 더 이상 무엇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으니까.
치료 종결 때문만은 아니야. 페르소나 뒤에 귀를 막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너를 발견했을 때부터 내 안의 무언가가 변하기 시작했어. 잘 다듬어진 완벽이 아닌 빈틈 많은 불완전함이 도리어 더 자유롭다는 걸 깨달았고, 약한 모습을 인정하고 보듬을 용기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는 걸 알았지.
우울과 불안, 무력과 자책. 그건 그저 삶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일 뿐. 모든 감정은 존중받아 마땅한 것. 찌꺼기나 삶을 어지럽히는 부유물 따위가 아니야. 결함이나 약점 또한 아니지.
이제는 확신해. 몸부림 가득한 순간과 아픈 감정 덕에 이곳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거야. 그것들을 인정한 뒤부터 비로소 너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거야.
페르소나 따위 저 멀리로 흘려보내. 그 무엇도 되지 마. 너는 너 자신으로 살아.
그렇게 살아가다 다시금 부유하며 떠오르는 감정들이 나타나면, 우울이든 불안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무엇이든 너를 괴롭히는 것이 생기면 이 글을 찾아와.
내게 남은 모든 다정함과,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그 모든 용기를 여기 남겨두고 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