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름, 2화

by 별님

서둘러 강릉역으로 돌아와 겨우 표를 살 수 있었다. 강릉역에서 포항까지 4시간 정도 걸리는 것 같았다. 조금 눈을 붙일까 하다가 잠은 포항에 도착하면 눈을 좀 붙이기로 했다. 도저히 일어날 자신이 없었다.


살며시 보이는 밤풍경은 블랙홀처럼 보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바다, 그 옆을 내달리는 기차는 사건의 지평선을 기웃거리는 것만 같았다.


아까 산 책, 아까 내가 끝까지 읽지 못하고 붉은색에 압도당해 덮어버린 책을 다시 열어보기로 했다. 내가 보는 건 죽은 고래가 아니라, 넓은 바다를 누비는 고래이길 바랐다. 나도 넓은 바다를 누비는 고래가 되고 싶었다.


기차는 조금 시간이 걸려 포항역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가로등이 아니면 앞길을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역 앞에서 택시를 잡아 탔다.


"호미곶 가주세요."


호미곶으로 가는 길은 머나먼 길이라는 걸 택시 미터기 요금이 알려주고 있었다. 끝없이 올라가는 것만 같은 택시비는 외지인과 현지인 사이의 어색한 침묵 사이에 눈치 없게 끼어들었다.


"감사합니다."


어색한 침묵은 창밖의 풍경이 중화시켜 숨은 쉬는 채로 호미곶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의 상생의 손은 조명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갈매기들 마저 모두 잠든 시간에, 이곳에 인적이 매우 드물어진 지금에 서서 가만히 검은 바닷물 위로 보이는 상생의 손을 보니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물체를 보는 것은 물체가 빛을 반사하여 볼 수 있다고 배운다. 지금 조명빛을 반사하는 상생의 손은 손바닥만이 강조되어 보였다. 손등은 검은색 바닷물과 어떤 대화를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보려고 했던 것의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니, 나도 내가 보려고 하는 나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에게도 상생의 손의 손등과 같은 모습이 있을 것만 같았다.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널린 건 벤치였고, 나는 혹시나 해서 가져온 체크 셔츠 하나를 더 껴입고 눈을 붙이려 벤치에 누웠다. 내 키가 그리 큰 편이 아니라 그런지 그럭저럭 누울 만했다.


집 안이 아닌 곳도 고요한 곳이 있었다. 여기가 그러하였다. 눈을 감으면 저 멀리서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에 들기 시작했다. 달콤한 휴식이었다.


사람소리에 깨어보니 밖은 아직 어두웠다. 시계를 보니, 새벽이었고, 다들 일출을 보기 위해 하나둘씩 모이고 있는 듯하였다. 나도 일어나 상생의 손 앞에 가 서보았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기억하는 이곳에 한밤중보다 여명이 밝아오기 직전이 더 어두웠다. 수평선을 따라 여명이 밝아왔고, 여명의 박수를 받은 태양이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머리를 내민 태양은 금세 떠올라 하늘에 붉은빛은 사라지고, 우리가 흔히들 하늘이라 하면 생각하는 푸른빛으로 하늘색이 바뀌었다.


무엇을 더 해볼까 하다가 무작정 걸어보기로 했다. 바닷가를 따라가면 길은 나오게 되어있으니, 해안도로 옆으로 난 인도를 따라갔다. 가다가 보니, 이런저런 사람 사는 모습이 보였다.


작은 해변가, 혹은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있는 여러 민박집, 형형색색의 지붕 모양, 거기서 서서 보면 보이는 저 멀리서부터 일렁이는 파도의 모양새. 이 모든 게 조화로워 보였다. 한 여름에 태양도, 불어오는 바다의 습한 열풍도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는 평화로워 보였다. 나와는 다르게. 그렇기에 동화되고 싶었다. 바다가 되고 싶어졌다.


바닷가를 걷다가 보니, 배가 고파졌다. 마침 저 멀리 편의점 간판이 보여오고 있었다. 간단히 라면이라도 먹으며 허기를 달래 보려 편의점에 발을 들였다.


라면코너에서 맨날 먹지만, 질리지 않는 라면을 집어 들었다. 계산을 하고 물을 부어 바다가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앉으니 고정된 바다가 보여왔다. 걸으며 보았던 흔들리는 바다와는 달리, 나의 숨소리가 섞인 파도소리와는 달리 바다라는 존재는 굉장히 고요했다.


바다는 말이 없었다. 혼자서라도 여러 말을 내뱉던 나와 달리, 바다는 말이 없다. 스스로 자신의 해야 할 일을 그 누구에게도 불평하지 않고 해낸다. 그래서 나도 지금 바다를 보고 있다. 나도 불평하지 않고, 그저 나의 할 일을 해내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라면을 먹으면서 내 눈에 보인 바다는 고요했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백사장, 재잘재잘 물장구치는 아이들, 한편에서 어푸어푸 수영하는 강아지까지. 고요했다. 고요함이었다, 분명 눈으로 보아도 고요했다.

내 안에 요동치던 파도는 어디로 갔는지, 막 부서져버린 건지, 저 멀리서 쓰나미가 되어서 돌아올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미래였지만, 지금의 고요가 마음에 들었다. 이게 폭풍전야여도 말이다.


모래에라도 잠시 발을 들여볼까 하다가 그 흙먼지를 털어내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 구경만 하기로 했다. 그래도 나름 재미있었다. 바람에 모래가 날리는 것도, 바람이 멈추면 다시 모래사장으로 가라앉는 것도, 내 눈에는 너무나도 웃긴 개그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었다.


또 한참을 걸었다. 해가 중천에 다다를 때까지. 내 눈에 정면으로 해가 비치기 시작할 때, 그때서야 나는 해안가를 따라 걷는 걸 멈췄다.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어 길에 보이는 콜택시 번호로 전화를 걸어 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타고 말했다. 포항역으로 가달라고 말이다. 더 걷기에는 지쳤고, 나는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택시에서는 잠깐 잠에 들었었다. 택시 기사님이 깨우는 소리에 겨우 일어나 포항역으로 들어갔다. 이동식 에어컨이 있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여기서 뭘 더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떠오른 한 가지. 일몰을 동해에서 본다면 어떨까 하는 요상한 기발함이 발동되었다.


그렇게 나는 부산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물어묵도 먹고 싶었겠다, 이럴 바에는 어묵의 본고장으로 가자고 마음을 먹고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경을 보고 싶었다. 광안대교의 그 웅장함을 두 눈에 담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엔가, 가족들이랑 가서 보았던 그 풍경이 나의 뇌리에 깊게 새겨져 있었던 모양이다.

일출과 일몰이라니, 낭만적이면서도 슬픈 시의 한 구절 같이 느껴졌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여름, 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