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여름이었다. 아주 무더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재난문자는 이제 읽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쏟아지고 있었고, 나는 재난문자의 폭우를 뚫고 매일같이 커피를 사러 나갔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카페는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갈 수 있었다. 가까워서 좋기도 했지만, 내가 딱 이만큼밖에 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기분도 들었다.
매일 마셔야만 하는 커다란 잔에 담긴 커피, 그 친구는 나를 각성상태로 만들어주는 존재였다. 다른 말로는 카페인 중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카페인 중독자인 나는 오늘도 그 힘에 기대 키보드에 손을 얹는다. 배경은 흰색, 내가 그 위에 검은색으로 무언가 적어 내리려 애를 써본다. 하지만 흰색은 쉬이 물들지 않는다.
"아!"
나는 또 키보드를 주먹으로 세게 내려친다. 키보드 또한 나를 미워하는지 그 이후에는 모니터에 알 수 없는 문자들의 배열을 뱉어놓는다. 나는 그걸 보며 생각한다. 세상이 나에게 하는 알 수 없는 말들의 배열과 같다고, 그렇기에 나는 더 이상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 같다고 말이다.
재난문자 속 내용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갔다. 해는 나를 질량이 없는 입자로 때리고 있고, 나는 이 전쟁터를 뚫고 어디론가 향한다. 어디로 가는지 정해두진 않았지만, 나의 눈에는 반품된 물건들을 파는 곳이 들어온다. 나도 이렇게 반품당한 상품인 걸까.라는 생각이 들 때쯤, 밖에서 보이게 전시해 둔 텔레비전에 선명한 바다가 보였다.
바다가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이 바다는 어딘가 하자가 있지도, 외롭지도 않아 보였다. 그저 존재함으로 그 가치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슨 가치를 만들어내야 했길래 이리 하자 투성이에 외로운지 궁금했다. 저 바닷속 심연에서 수압에 의해 짓눌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 나는 적어도 바다와 함께일 테니까.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 졌다. 정말 뜬금없다고 생각할 만한 일이지만, 그래도 나는 바다가 보고 싶었다. 무언가 떠올리고 느껴진 느낌이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웠다.
바다를 향해 가기로 했다.
나는 당장 스마트폰으로 내가 당장에 쓸 수 있는 돈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했다. 짧은 여행을 하기에는 충분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당장 기차표를 예매했다. 강릉으로 가는 고속열차를 끊었다. 돌아오는 표는 따로 사지 않았다. 그저 내가 다시 무언가를 할, 글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할 마음이 생기면 다시 돌아오기로 마음먹었다.
집으로 향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가는 1시간 반 남짓. 기차역까지 갈라면 그 안에 내게 필요한 것들을 챙겨야 했다.
집 한편에 있는 생수 두 병과 혹시나 땀에 젖으면 갈아입을 옷, 혹여나 무언가 떠올릴 수 있다면 그 내용을 적을 작은 노트와 가장 아끼는 볼펜을 챙겼다. 다른 건 더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청량리역으로 향하는 1호선 전철을 향해 갔다. 역이 근처에 있지만, 분명 지도는 그렇다고 하지만, 이 날씨에 이 거리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겨우겨우 인천행 열차에 올라탔다. 이 더워 속 지하철은 움직이는 쉼터였다. 내가 앉아있어도, 잠시 눈을 붙여도 그 누구도 트집잡지 않았다. 바람도 시원했다.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강릉에 가야 했다. 갯벌보다는 푸르른 바다가 더 보고 싶었다.
청량리역에 내렸다. 동해선 열차를 타는 데 까지는 꽤 걸어가야 했다. 서울역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긴 편이었다. 길도 헷갈리기 쉬웠다. 하지만 어찌어찌 기차를 타는 곳에 다다르기는 했다.
안내방송은 내가 탈 기차가 곧 도착한다고 이야기했다. 저 멀리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뽐내는 세 개의 전조등이 아득하게 보여왔다.
기차는 요란하게 내 앞에 멈춰 섰고, 열차 출입문은 한 김 빼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내가 잠시 앉아있을 공간이 나타났다.
기차는 몇 개의 역을 거쳤다. 지도를 보니, 충청북도 쪽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오래 걸리는 게 이유가 있었다.
정말 신기한 지명의 역을 두세 가지 정도 경유하여 강릉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려 대합실에 내려가니, 특이한 역의 구조를 볼 수 있었다.
이 역은 돔처럼 생겼다. 둘레를 따라 있는 상점과 식당은 굶주린 내게 유혹처럼 느껴졌다. 기차역에서 무언가 먹기에는, 물가가 너무 살인적이었다. 밖에 나가면 무언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꼬르륵 거리는 배를 붙잡고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길을 나서니 보이는 건 인도와 걸어가기 복잡한 로터리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발이 닿는 대로 걸었다. 처음에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내 눈으로는 서녘 하늘을 가득 채운 햇살이 내 눈에 들어왔다. 하긴 이미 정오가 지난 뒤였으니 시간을 고려하지 않는 나를 탓해야 했다.
너무 멀리 와버렸는데, 보조 배터리 하나 없이 출발을 했던 나 녀석으로 인해 스마트폰은 긴급 시에나 사용해야 하는 벽돌로 전락해 버렸다. 보조배터리를 사기에는, 남은 돈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일회용 보조배터리는 더욱이 사치였다.
한참을 걷다가 마주하게 된 곳은 어느 동네의 독립서점이었다. 이 여름에 에어컨 바람이 쌩쌩 부는 서점이라니! 나는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갔고, 그곳이 천국이었다. 냉기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정신줄을 붙잡으니 이곳은 와인과 커피를 책과 함께 파는 곳이었다. 책과 커피와 와인이라니, 이런 환상적인 조화를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나는 찬찬히 서점을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책의 한 문장만을 미리 보기로 붙여놓은 채 종이로 감싸 팔고 있는 일명 랜덤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에세이 종류의 랜덤책을 골랐다. 그리고 카운터에서 계산을 한 뒤, 창가 한편에 앉아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그 책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말이다.
내가 고른 책은 분명 푸른빛의 표지로 되어있었다. 분명, 분명 나와 이 책이 마주한 순간에는 푸른빛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때에 나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분명 옳은 줄로만 알았던, 그러한 이야기들에 대한 이면과 반박이 담긴 책이었다. 분명 내용물은 붉은빛이었다.
책을 읽다가 보니, 겉은 푸르른데 속은 새빨간 것들이 몇 가지 떠올랐다. 그중에 하나가 죽은 고래였다.
어느 날엔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죽은 고래는 심해로 가라앉으며, 여러 물고기들의 먹잇감이 된다고 말이다. 심해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고래는 그리되겠지만, 인간의 손에 잡힌 고래는 돈으로밖에 안 보일 것이다. 그렇게 살아있는 고래를 잡아다가 팔아먹으면 그들의 손에 남는 게 돈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 책의 잔혹한 이야기에 잠겨있었던 것 같다. 다 읽기는 너무 힘들었다. 이러다가 나의 바다가 피바다가 될까 해서 읽기를 그만두었다. 이미 밖은 다 어두워져 버린 뒤였고, 이곳에서 약간의 술을 즐기러 오는 이들이 하나둘씩 보였다.
나도 술을 조금 마셔볼까 하다가, 나에게 주어진 돈과 시간은 그런 식으로 탕진하기엔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나에게 여유를 주고 싶었지만, 순간 나에게 남겨진 작가로서의 과제가 풀리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와 걸었다. 사람들은 다들 어딘가 여유로워 보였지만, 나는 여유를 구경할 여유조차 없었다. 강릉의 밤은 뜨거웠고, 나는 그 안에서 구워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저 멀리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시계를 보니, 이미 시간은 내일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중이었다.
멍하니 바다를 보았다.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바닷가에서 해가 떠오르는 걸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나를 핏속에 담가 둔 이곳에서 보고 싶지는 않았다.
순간 떠오른 한 장면이 있었다. 떠오르는 해, 그리고 그 해를 배경으로 비치는 상생의 손. 그래, 나는 포항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마 지금부터 가려면 조금 힘들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 번뿐일 수도 있는 이 순간인데 어떻게 잘 즐겨낼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가보기로 했다. 이 밤을 달려 포항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