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위에 꽃을 피우는 일을 아시오?-3화

by 별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자, 곧 우리 자체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 그 많은 원고를 그 많은 신문사와 문예지에 돌렸을까. 지금 들은 일로만 따져도 나는 역사의 반복을 내 두 눈으로 생생히 목격 중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보였다.


우리의 원고는 무엇을 바라 쓰였을까. 진실과 순수와 예술인과 시민. 이 네 가지 안에 다 담길 것처럼 구는 나의 신념은 이 그릇에 다 담기지 못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아주 옹졸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옹졸하게 글을 쓰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 이 모든 일을 하고, 스스로를 닦달하고, 스스로를 스스로의 노예로 만들어버리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제외한 그 어떠한 것의 노예도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 이외의 존재에게 노예가 되는 순간, 그것은 예술품이 아닌 하나의 공산품의 불과해진다.


우리를 구성하는 나는 대체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아직 몸만 커버린 아이일지도 모르는 내가 지금의 내가. 어떤 방법으로, 어떠한 이유로 인해서 이곳에 왔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나는 이제 이 역사의 반복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리석다. 어떻게 자신의 원래 위치에서 하지 못하는 것을 불편한 갑옷으로 치장한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에서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나는 대체 스스로에게 무엇을 말하지 못했기에 이곳으로 오는 형벌을 받은 건지 모르겠다. 나는 무엇일까. 이 시간과 저 시간 사이에 끼어서 허덕이는 나는 무엇일까. 이제 이곳에 주민등록 기록이 남아있을지 아닐지도 모르는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무엇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나는 이제 진심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해내야만 한다.


종이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내가 나의 세계를 모두 토해내고 나면 남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새로운 원고를 향한 백지이기에, 나는 이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야 한다. 나의 세계를.


“진호 씨, 우리는, 어쩌면…… 미래에 대한 편지를 쓰라는 임무를 맡은 건 아닐까요?”


가만히 날짜만 쓰인 백지를 보는 나에게 수연이 물었다. 미래에 대한 편지라. 역사를 기록하는 이유와 비슷하게 보였다. 지금에서 미래를 향해 쓰는 편지. 오늘을 기해 미래의 나에게 쓸 수 있는 말은, 너에게, 이 나라에게 남길 수 있는 나의 이야기는 무엇이 있었을까. 1960년대의 내가 이곳을 향해 남길 수 있는 말은 무엇이 있을까. 나는 수연이 하는 질문에 답을 해주고, 되려 수연이 나의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있지도 않을까. 잠시 생각이 들었지만, 얌전히 글이나 쓰자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기어 나와 마음에 파고들고 있었다.


“그런 걸까요. 대체 이 일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가난한 삶을 살아도 글을 쓰는 것? 아니면, 그 누구도 내지 못한 목소리를 내어보는 일? 어느 쪽이든 작가란 일은 배고프고 가난한 일인 것 같아요. 지금의 작가는 어떤 일이 되어있는지는 몰라도, 저에게 있어서 작가라는 일의 궁극적인 목표는 과거에 대한 회고록이자, 현재에 남기는 묘비이자, 미래를 향한 편지를 쓰는 일인 것 같아요. 수연 씨 생각이 맞을 것 같아요. 하지만, 하나 알아주세요. 저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걸요.”


수연은 나의 말에 잠시 침묵이라는 공백을 시간에 새겨냈다. 그리고 그 공백의 끝에서 내게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할게요. 그 일. 과거에 대한 회고록, 현재의 묘비, 미래를 향한 편지. 그 세 가지가 어떻게 해야 성립할지 생각이 날 것 같아요. 근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요.”


이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회고록이자 묘비, 그리고 편지. 이 세 가지를 다 성립시키려면 우리는 무엇을 최우선 가치로 해야 할까.


“저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적어도 그때의 저는 말이에요. 문학인의 존재 이유는 진실과 순수와 예술인과 시민을 위해서라고 말이죠. 언제나 진실을 추구해야 하고, 순수히 이 네 가지를 위한 글을 써야 하며, 예술인과 시민을 위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손에 쥐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근데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더라고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삶에 있어서 짙은 회의가 찾아왔던 게.”


수연은 나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의 눈은 진지함이 가득했다. 앙 다물어진 입술과 허공을 응시하지만, 그 안에 생각이 담긴 눈에 나는 왜인지 모를 감정이 들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그러면, 그 삶에서 느낀 건 무엇이었나요? 회의가 짙어진 이후의 삶에서 뭘 느끼셨는지 궁금해요.”


수연의 의중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하고 싶었다. 의심이 주는 힘을 믿는 것일까. 일단 나는 답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무기력함이었어요. 저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왔었죠. 그러면서 주변을 많이 돌아다본 것 같아요. 주변에 작가들은 무엇을 쓰는지, 어떤 삶을 살아내는지 그런 것 말이에요. 근데 신기하게도 저의 이상과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던 것 같아요. 진실은 잊히고, 순수는 타락하고, 사람들은 그저 그런 당절임에 익숙해져 갔죠.”


나의 말에 수연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는 얼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추론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그 무엇도 알아낼 수 없었다.


“진호 씨. 정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우리가 해나가야 할 일의 본질일까요? 제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우리의 본질은 역사조차 남기지 못하는 기록을 남기는 일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수연은 중심이 없는 우주, 그 어딘가로부터 오는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마치 외계 지적 생명체를 만난 것 같은 이 기분은 나의 작품에 있어서 더 깊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작가로서,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그 누구나 갖고 있지만, 내지 못하고 있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고, 작가로서의 의무를 방치하는 건, 그 목소리를 묵인하는 것일 것 같아요.”


사실 이 이야기에 정답은 없었다. 모범답안 또한 없다. 그저 우리는 철저한 자기비판과 자기 의심을 통해서 가꾸어나가야 하는 존재라는 건 확실히 참인 명제였다.

“써보죠. 써봐야지 결론이 나든 말든 죽이든 밥이든 될 거잖아요. 그러니까 같이 해보죠. 우리의 현재가 아닌,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우리의 작품과 예술에 대한 열망이 불타오르는 게.


작품을 쓴다는 건, 어떻게 보면 자신의 이면과 마주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작가라는 존재는 어찌 설계된 존재인지는 몰라도, 하나 확실한 건 이들은 머릿속에 자신의 세계를 무진장 많이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많은 작품에 나타나는 그 많은 세계는 관점만 다른 같은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요. 우리가 해내야, 다른 이들 또한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갖겠죠.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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