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야. 내 호영이다. 우리 소영이 누나가...... 우리 누나가...... 어제 죽었다."
2004년 초복이었다. 그날은 개발 중인 소프트웨어의 새로운 버전 발행일이어서 점심 먹을 시간도 없었다. 저녁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 버전 발행 담당자가 최종 테스트 중이었고, 우리는 저녁에는 꼭 삼계탕을 먹자고, 어느 식당을 갈 것인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 소식이 전해졌다.
소영이는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만난 친구였다. 우리는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 같은 반이었다. 생일도 1주일 차이여서 학교나 집에서 내내 붙어 다니며 언니니 친구니 티격태격하기 일쑤였다. 소영이네 집은 정문 바로 앞 도로에서 구두방을 하고 있었고 우리 집은 학교 후문 바로 뒷골목이었다. 둘 다 정문이던지, 후문이던지 학교를 바로 들어가면 되는데, 항상 내가 소영이네 앞으로 가거나 소영이가 우리 집 앞으로 와서 같이 등교를 했다. 서로의 집에서 저녁 먹고 놀다가 잠만 집에 가서 자곤 했었다. 소영이는 조용필과 하희라를 좋아했었다. 우리는 모여 있으면 같이 조용필의 음악도 듣고, 좋아하는 하희라의 덕질도 같이 했다. 조용필의 새 노래가 나오거나 하희라의 새로운 사진을 구하면 나는 소영이네 집으로 달려갔다. 어떤 날은 같은 동네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과 골목길에서 고무줄도 하고 오징어 게임도 하고 쉬지 않고 놀았었다. 지금에 비하면 정말 할 것 없던 시절에 알차고 즐겁게 소영이랑 국민학교 시절을 보내고 같은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에 가면서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도 달라졌고, 서로의 꿈도 달라졌다. 소영이의 방에는 홍콩 배우 장학우와 주윤발의 포스터가 붙었다. 내 방에는 성룡의 포스터가 붙었다. 소영이는 변진섭의 노래를 들었고, 나는 이정석의 노래를 들었다. 예전만큼 자주 만나진 못해도 우리들은 서로 좋아하는 배우나 가수의 사진을 구하거나 재미있는 홍콩영화 비디오를 빌리면 서로의 집이나 골목길에서 만났다. 학교의 복도를 지나다가 서로의 반을 지날 때면 꼭 얼굴을 내밀고 손 한번 흔들고 지나갔다. 시험 기간에는 아침에 서로 사탕이나 초콜릿을 가져다주고 응원했다.
2학년이 되면서 소영이는 실업계를 선택하고 나는 인문계를 선택했다. 공부하는 목적이 달라지니 각자 만나는 친구의 성향도 달라졌다. 소영이도 나도 서로의 각자의 친구를 만들어가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엔가 소영이 친구가 내 친구, 내 친구가 소영이 친구가 되었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더욱더 만나는 시간이 뜸해졌다. 소영이도 나름대로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취업을 준비하고 자격증을 준비하고 학교 성적도 신경 쓴다고 바빴고, 나는 대학입시 준비한다고 바빴었다. 3학년이 되면서 소영이는 일찍 취직을 해서 일을 나가기 시작했고, 나는 밤 12시가 되어 집에 들어갔다. 점점 더 만나는 시간이 줄어 거의 주말에만 통화를 할 수 있었고 너도 나도 친구인 '우리 친구'의 범위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고향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다른 도시의 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대학 생활을 하느라, 소영이는 직장 생활을 하느라 주말에 전화하던 횟수도 점점 줄었고, 내가 고향에 방문하는 주기도 길어지면서 우리가 만나는 주기도 점점 길어졌다. 한 학기에 한두 번 고향에 내려가서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밥 먹고 술 마시면서 살아가는 얘기를 하다 보면 밤새기도 일쑤였다. 그런데 이 만남도 서로의 남자 친구가 생기고 시간이 흘러 갈수록 뜸해졌다.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던 해에 소영이 몇 년 전부터 만나왔던 남자 친구와 결혼을 했다. 너도 나도 친구인 '우리 친구'들 중에서 제일 빠른 결혼이었다. 소영이의 사주에 안 좋은 결혼이라고 반대하던 아버지도 어머니도 고명딸의 결혼식장에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나중에 들었는데 부모님이 유명한 무당에게 궁합을 봤는데 남자는 이 결혼을 해야 흥하고, 여자는 이 결혼을 하면 남자에게 기(氣)든지 운(運)이든지 명(命)이든지 간에 다 빨리는 아주 나쁜 궁합이라 반대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나중에 이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두고두고 이 결혼을 끝까지 반대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셨다.
내가 취직을 하고 2013년 말 프로젝트 때문에 고향에 있는 지사로 내려와 있을 때 소영이는 임신 소식을 알려왔다. 애칭이 호동이인 소영이의 동갑내기 남편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남편 같았고, 사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누이나 시댁 어른들도 소영이를 친딸처럼 대하는 것 같았다. 싹싹한 소영이의 성격에 미움받을 일도 없었다. 7월 초 날씨가 더워질 무렵 만삭에 가까워진 소영이가 전화를 했다.
"바쁘다. 왜?"
"미친년, 니 바쁘다가 인사가? 세상 돈 니 혼자 다 버나? 바쁜 척은. 나도 바쁘거든."
"삐짔나? 사랑하는 거 알제? 무슨 일 있나?"
"아이다. 그냥 힘들어서 전화했다. 몸이 무겁어가. 다리도 아프고."
"마이 힘드나? 만삭이 다 돼가 그러나?"
"그런가 보다. 어지럽고 힘들다아이가. 니는 아직 모르재?"
"미칬나? 내가 알면 큰일 나지. 아무튼 알았다. 이거 내 오늘 끝내 보고 주말에 쉴 수 있게 해 볼게. 알았제?"
"오야. 내 볼라면 쎄가 빠지게 열심히 해라. 알았나?"
그러나 나는 그날 일을 끝내지 못했고 주말에 출근을 해야 했다. 우리는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1차 완료 후에 휴가를 내고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소영이의 장례식장은 본가 근처 대학병원 장례식장이었다. 마무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맡기고 바로 퇴근을 해서 옷을 갈아입었다. 울음도 나지 않았다. 호영이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오늘 프로젝트 마무리되면 휴가 내고 만나서 놀기로 했었다. 옷장에서 검은색 옷을 찾아 입고 서둘러서 장례식장으로 갔다.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이 몸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기계처럼 장례식장에 들어선 나는 제단 위에 놓인 소영이의 웃는 얼굴을 보고 나서야 무너져 내렸다.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친구의 얼굴이 있어서는 안되는 장소에서 웃고 있었다. 가슴속에서 무거운 덩어리가 바닥까지 내려앉고 있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한참 후에야 옆에 있는 아버지와 호영이와 뒤에 떨어져 서있는 남편이 보였다. 어머니는 탈진해서 링거를 맞고 계시고 진영이 오빠는 어머니를 돌보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와 호영이 손을 잡고 같이 한참을 울고 나서야 말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 어떻게 된 거라예? 소영이가 왜 저기에 있어예? 호영아. 이게 무슨 일이고?"
"누나야. 우리 누나 불쌍해서 어떡하노?"
나중에 알았지만 소영이는 임신중독증이었다. 손위 시누이가 간호사여서 집에서 가까운 병원을 두고 시누이가 일하는 병원을 다니고 있었다. 시누이는 별거 아니고 위험하지 않다고 적당히 운동을 하라고 했고 소영이의 몸상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지 종종 소영이를 데리고 본인이 다니는 암자로 기도를 하러 갔었다고 했다.(나중에 49제를 하기 위해 그 암자에 방문했는데 주차를 하고 흙길로 10분 정도 등산을 해야 올라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날도 시누이는 소영이를 데리고 기도를 하러 산을 올랐고, 같이 절을 하고 일어서다가 소영이는 못 일어났다고 했다.
"누나야. 내 돌아삐겠다. 그 시누라는 미친년이 코빼기도 안 보인다. 응급실로 왔으면 같이라도 있어야지 매형만 있고 그 시누는 도망가 삤다. "
"아는? 아기는 유산된기가?"
"아이다. 위험했어도 인큐베이터에 들어가면 살 확률이 절반은 된다고 했는데 매형이 포기했다. 누나랑 같이 가라고."
그렇게 소영이는 아이와 함께 한 노시인의 시처럼 아름다운 소풍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갔다.
시누이는 결국 장례식장 내내 얼굴을 비추지 않았고 49재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아무리 분노를 느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버지는 결혼을 막지 못한 자신을 탓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며칠 사이 늙어버린 얼굴로 넋이 나가 있었다.
얼마 동안 나는 계속 후회를 하고 자책을 했다.
'아무리 바빴어도 밤에 찾아가 얼굴을 봤어야 했다. 한 번이라도 더 전화를 걸었어야 했다. 소영이의 얘기를 더 들었어야 했다.'
소영이는 내 결혼식에도 오고, 나중에 우리 아이들끼리 놀게 하고, 늙어서 계모임도 하고, 같이 여행도 가서 남편들 욕하고 그러면서 살 줄 알았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아직까지 우리가 같이 살아온 시간보다 곱절은 더 남아있는 줄 알았다. 그렇게 후회를 하면서 나는 일상에 복귀했다. 여전히 바빴고 일주일에 서너 번은 밤을 새웠다. 한동안 문득 소영이가 떠올랐고, 목이 메었다. 그럴수록 더 컴퓨터에 얼굴을 파묻고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바빠질수록 소영이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 내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서울 사무실로 복귀했고, 일상에서 소영이를 떠올리며 목이 메는 시간이 거의 없어졌을 무렵, 새벽에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술을 드시고 소영이가 보고 싶다고, 그래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고 하셨다. 한참을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참을 쏟아내시고는 말씀하셨다.
"미안하다. 내 소영이 보고 싶으니까 니 생각이 나가. 니 요즘도 바쁘나? 내가 자는 거 깨밨나?"
"아니요. 괜찮아요. 저 아직 회사라서 안 자고 있었어예."
"내 바쁜 거 방해했네. 아버지가 주책이다."
"아이라예. 아버지. 내 다담주에 내려가서 찾아가 뵐게요. 아직 거 사시지예?"
"아이다. 이사했다. 올 때 전화해라. 내 미안하데이. 끊자. 욕 바라."
얼마 뒤 내가 전화했을 때 아버지도, 호영이의 전화번호도 다른 사람이 받았다. 바뀐 번호는 알지 못했고, 난 소영이의 남은 가족이 이사한 곳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소영이네 가족과도 인연이 끊겼다. 소영이가 있는 납골당을 찾아갔는데 가족납골당으로 옮겼다고 했다. 아마도 부모님도 호영이도 나를 봤을 때 소영이가 떠오르는 것이 힘들고 아팠었나 보다. 내가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한동안 다시 아팠던 것처럼.
요즘은 힘들 때보다 하늘이 너무 푸르면, 별이 쏟아질 것처럼 많으면, 아름다운 꽃을 보면, 바람이 좋으면 소영이를 떠올린다. 소영이가 떠났을 때 미안하고 아팠던 마음은 내 안의 깊은 곳에 넣어두었고, 우리 어렸을 적 즐겁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그리고 하늘로 돌아가 아이와 함께 여기저기 여행하고 있을 소영이를.
"니 지금 어디 여행하고 있노? 내 좀 더 늙어서 갈게. 그때 니는 계속 20대고 내는 폭삭 늙은 할머니겠다. 그때 내 놀리면 안된다. 그때 보자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