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우울한 날 듣는 노래

박정운의 <기억에 남는 건 너의 젖은 눈동자>를 들어본적 있나요?

by 골방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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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툭 툭. 장대 같은 비가 내린다. 우산 위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나는 기억이 났다. 8살 내겐 상당히 넓어 보였던 골목길.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차 두 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는 없었던 길. 그 골목길에는 항상 오후 비슷한 시간이면 동네 아이들이 모여들었었다. 신발 집 주야도, 국수 공장 성호도, 옆 동네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야구를 하는 수창이 오빠도, 실비 집 미정이도, 안경 공장 샛별이도 모두 모여 같이 놀았었다. 특별히 재미있고 신나는 장난감이 없어도 뛰어다니면서 발야구도 하고, 매일 전우의 시체를 넘는 고무줄도 하고, 넓은 사각형 안에서 1등을 따라 하고 카바를 외치는 카바 놀이 등 정말 우리가 하는 놀이는 끝도 없이 많았다.

기억 속의 그날은 비가 정말 많이 왔다. 우리 무릎까지 비가 찰박찰박하게 찼었다. 집안까지 물이 들어왔었는지는 기억에 나지 않지만 신발가게 뒤에 붙어있던 주야네 마당에도 물이 우리 무릎까지 차올랐었다. 어른들이 무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물을 퍼내고 있었거나, 아니면 비 피해를 피할 방법을 찾고 있었을 테지. 아마도 그때는 우리가 밖에 나가서 놀아주는 게 좁은 공간에서 일하는 어른들이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은 그냥 잠을 잘 때 입던 옷 채로 우산만 쓰고 밖에 모였다.


'툭툭 툭툭 툭툭'


우산 위로는 아주 빠른 리듬의 장단이 연주되고 있었다. 우리는 우산을 쓰고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2층 높이의 배수로에서 떨어지는 폭포 같던 빗물을 우산으로 막아내곤 배꼽 잡고 웃다가, 발로 물 차기를 하면서 놀다가, 마당에 있던 키만큼 높은 빨간 고무 다라이 안에 모인 빗물 속에서 목욕탕 놀이도 했다. 우리가 들고 다니던 우산은 어느 틈엔가 주야네 마당 한쪽 구석에 던져져 있었고, 우리는 골목 안 여기저기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뛰어다니며 놀았다.

집에 돌아왔을 땐 속옷까지 완전히 젖어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얼마나 신났던지 현관 앞 수도에서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며 찬물로 씻는 데도 계속해서 무얼 하고 놀았는지, 폭포 같은 비를 맞을 땐 소리가 어땠는지 쉬지 않고 떠들었다. 그렇게 장대비 내리는 날 속옷까지 축축이 젖은 상태로 신나게 놀아보고 느낀 그 흥분과 여운이 사진 한 장처럼 남아 있었다.


20살이 되면서 나는 대전에 있는 국립대에 입학했다. 비록 기숙사 생활이었지만 부모님의 집에서 처음으로 독립이란 것을 했다. 기숙사는 학교의 맨 안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학교 정문에서 오르막길을 3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기숙사가 보였다. 그곳에서 난 내 또래의 3명의 여자 친구들과 1년간 지냈다.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타지에 나와서 적응하며 살다 보면 문득 외로움과 우울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나같이 사람들하고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속은 쉽게 내어주지 못하고 실제로는 겉돌고 있는 사람에게는 무리 속에서 지내다 어느 순간엔가 외로움이 우울함을 끌고 물 밀 듯이 밀려올 때가 종종 있다. 아마도 그날도 그런 날이었나 보다. 여름날 기말고사를 마치고 학과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문득 너무 외롭다고 느꼈는지, 아니면 옆에 앉은 짝사랑하던 선배에게 내가 존재감이 전혀 없다고 느꼈었는지 내 머리 위로 검은 구름이 몰려오던 그런 날이었다. 학교 근처 가게에서 모임을 마치고 학교 기숙사로 올라가는 길에 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우울함이 더해졌었다.

학교 뒷문 앞 공대 관에 도착했을 즈음 ‘투투 툭툭툭’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짜증이 밀려왔다.


‘에이씨! 우산 없는데. 아, 짜증 나.’

‘뛸까? 에이씨! 기숙사까지 어떻게 뛰어 올라가.’


그렇게 고민하고 짜증내고 있는 사이에 비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공대 앞이니 기숙사까지는 빠른 걸음으로도 20분은 더 걸어가야 했다.


‘에라, 모르겠다.‘


난 다 포기하고 그냥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장대비가 더 굵어지면서 머리는 이미 다 젖었고 어깨에서도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내 입에서 노래 하나가 흥얼거리며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기억에 남는 건 너의 젖은 눈동자, 너에게 물었지. 외로우냐고.

비 오는 날이면 그렇게도 좋다며 티 없이 웃었던 너의 얼굴 생각나.

오늘도 이렇게 비는 쏟아지는데, 난 무슨 생각 잠겨 있을까?’

1111.PNG 박정운 1집. 오늘 같은 밤이면

갑자기 하필이면 왜 그 노래였을까? 난 기숙사로 올라가는 오르막 길에서 계속 그 노래의 1절을 반복해서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장대비에 속옷까지 완전히 젖어버렸다. 그때 난 어린 시절 아이들과 뛰어놀던 비 오던 그날이 떠올랐다. 사진처럼 인화되어 새겨져 버렸었던 감정이 떠올랐다. 비 오던 어린 시절에 새겨 두었던 흥분과 여운이 우울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입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노래.

‘기억에 남는 건 너의 젖은 눈동자.’

헤어진 연인을 기억하는 이 슬픈 노래가 어린 시절, 장대비에 완전히 젖은 나를 기억 속에서 불러내고 있었다.


기숙사에 도착했을 때, 내가 발을 내딛는 곳에는 머리 위에서부터 흘러내린 물들이 물 발자국을 흥건하고 만들고 있었다. 어린 시절 엄마의 잔소리처럼 사감 선생님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바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말끔한 상태가 되어 책상에 앉은 난 CD플레이어에 박정운의 CD를 꽂고 조금 전까지 내 입으로 흥얼거리던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난 그렇게 몇 번은 더 비를 맞았고 그때마다 내 입에선 어김없이 같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어린 시절의 비 오던 날을 떠올리면서 다시 비 맞고 완전히 젖는 순간을 즐겼고 흐르는 빗물에 내 속의 우울과 외로움도 같이 씻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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