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들이 모두 자러 간 시간, 나는 컴퓨터를 켜고 브런치에 들어가 <작가의 서랍>부터 열어본다. <작가의 서랍> 속에는 내 머릿속의 이야기 주머니에서 꺼내 놓은 단어와 문장들이 즐비하다. 지난주에도 그중에서 글감을 골라서 써보려다가 실패했다. 지지난주에도 고르다가 결국은 열 문장 쓰기에서 갑자기 다가온 이야기로 마무리하지 않았던가. 이번 주도 <작가의 서랍>에서 글감을 찾는 것은 실패했다. 그럼 이제 할 일은 가만히 앉아서 이번 주에 머릿속에 만들어두었던 아직 꺼내지 못한 이야기 주머니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난 어릴 때부터 공상에 빠지는 시간이 많았다. 국민학교 입학 전에는 엄마와 떨어질까 봐 많이 불안했었는지 두려웠던 상상만 기억이 난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꿈은 어두운 밤 내가 기차역의 플랫폼에 서있고, 까만 옷을 입은 남자들이 엄마를 잡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손을 뻗고 울면서 '엄마'를 외치고, 주변은 점점 더 어두워지며 열차는 떠나고 결국 멀리서 들리는 기차소리만 오래 남아있었다. 그 장면이 온전히 내가 꾼 꿈인지, 아니면 떠오르지 않는 오래된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영화의 한 장면에 어릴 적 꿈의 기억이 짜깁기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른이 될 때까지 어두운 밤 멀리서 기차소리가 들리면 잠들지 못하곤 했다.
조금 더 자라서 사춘기가 되기 전에는 내가 히어로가 아닐까 오랜 시간 고민했었다. 국민학교 때 눈을 어슴프레 뜨면 동글동글 물방울 같은 것이 보이는 착시 현상이 생기는데 이것이 나의 초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얘들아. 나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수증기를 볼 수 있다!"
"안경 써!"
"혹시 내가 자동차에 치이거나 죽을 것 같은 상황이 되면 갑자기 초능력이 나오는 거 아닐까?"
"그전에 병원부터 가보자."
그즈음 난 초능력뿐만 아니라 무협물에도 빠져있었다. 86년을 전후로 홍콩 TV에서 방송되었던 무협 시리즈가 비디오 대여점에 가득했다. 김용의 소설들을 TV 시리즈물로 먼저 만났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영웅호걸들은 몸속의 기를 단련해서 무술을 연마하고 고수가 되었다. 그리고 혈을 찍어 상대방을 마비시키고 장풍을 쏘며 하늘을 날아다녔다. 난 머릿속에 '동동'이라는 여주인공과 "곽우"라는 남주인공을 만들었고 어린 시절 소꿉친구였던 동동과 곽우가 적에 의해 헤어졌다가 만나서 무림 비급을 차지하는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그러다 무협에 대한 재미가 시들해질 무렵 만들다만 이야기는 주머니 속에 넣고 머릿속 이야기 창고에 던져버렸다.
중학교 이후는 친구들 사이에서 할리퀸 소설과 '잃어버린 너'같은 절절한 멜로 소설이 유행하고 '질투'같은 가벼운 로맨스 드라마가 TV에 방영되었던 때였다. 자연스럽게 나의 이야기 주머니도 달달한 로맨스로 채워졌다. 당시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은 떠오르는 글감을 중얼중얼 대화로 엮어내는 거였다. 잠자려고 누워서는 매일 밤 혼자 '중얼중얼' 원맨쇼를 했다. 대부분의 여주인공은 '다인'이었고, 내용은 여러 가지였지만 기본적인 이야기의 틀은 두세 개 밖에 되지 않았었다. 배구부, 미술부, 학생회나 학교 혹은 교회에서 다인이와 선배들이 얽힌 삼각관계, 불치병에 걸린 다인이의 절절한 사랑이야기, 출생의 비밀을 알아버린 다인이의 얽혀버린 사랑이야기 등 모두 뻔한 멜로물이었다.
대학 다니는 동안에는 내가 차원 이동 능력과 예언의 능력이 있지 않나 의심하고 상상했었다.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잠시 뒤 벌어질 일들을 암시한 복선이 아닐까?', ' 갑자기 저 터널을 통해서 다른 차원으로 들어온 게 아닐까?'와 같은 상상들. 그 상상들은 이야기로 연결되었고, 다른 차원과 겹쳐 살아가는 우리가 도플갱어를 만나는 이야기, 터널이 지나고 다른 차원으로 들어와서 겪는 모험, 지구 멸망 등의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머릿속에서만 그려지다 마무리되지 못하고 창고에 처박혔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추리물이나 스릴러를 만들었다.
"내 차가 지나가는데 바로 앞의 고층빌딩에서 사람이 떨어져서 내 차 본넷 위로 떨어지는 거야. 난 형사이고, 마침 그 사람은 내가 얼마 전에 만났던 사람이야. 그래서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거지."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면 돌아오는 회사 사람들의 반응은 한 가지였다.
"요새 회사일이 힘들어?"
그 당시에 만든 이야기들은 대부분 살인사건, 카이저 소제 같은 뒤통수치는 것들이었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다 보니 항상 이야기는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주머니 속에 갇혔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주머니에 넣어 창고에 쌓아두면서 한 번도 꺼내서 글로 써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오직 글쓰기는 일기와 대회 제출용 글쓰기와 대입 논술을 위한 설득하는 글쓰기, 회사에서 업무를 위한 용도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그림책을 보기 시작하면서야 내 머릿속 이야기들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더 이야기를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글도 부지런해야 쓸 수 있다. 언제 뮤즈가 찾아올지 모르니 항상 쓰고 있어야 한다는데 아직 쓰기가 체득화되지 않은 나는 생각이 날 때마다 늘 하던 대로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풀었다. 음악을 들으며 운동을 하다가 문득 옛 기억이 떠오르면서 이야기를 쌓았고, 캠핑을 가서 모닥불 앞에서 큰딸 은이의 뼈 때리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랬다. 가끔 기억이 나면 첫 문장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작가의 서랍>에 써두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숙제를 하기 위해 <작가의 서랍>을 열거나 나의 이야기 주머니에서글감을 찾지만 그 이상 풀리지가 않았다. 떠오른 첫 문장만 적어 두는 게 아니라 그 순간의 기분을 기록하고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 살들을 더 많이 적어 놨어야 했는데 머릿속의 주머니에 넣어둔 작거나 너무 빨리 스쳐간 느낌들은 저장 시간이 너무 짧아서 이미 소멸되어 버렸다.
오늘도 이번 주 숙제를 하기 위해서 머릿속의 주머니를 열어본다. 최근에 만들어진 이 주머니, 저 주머니를 들쑤시다가 안쪽에 있는 먼지 쌓인 주머니들에 눈길이 갔다. 너무 오래 묵혀두어서 글로 다시 끄집어내려면 긴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아! 그러면 무슨 글을 써야 해?"
요즘 글쓰기 숙제를 할 때 계속 울리는 외침이다.
내가 주머니 속에 넣은 이야기들이 작거나 스쳐가는 순간의 느낌까지 포함한 채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시간은 반나절이 최대 지속 시간인 것 같다. 결국 꺼내기 힘든 먼지 쌓인 주머니를 덜 만들려면 매일, 생각날 때마다 매시간 쓰고 있어야 하나 보다. 그러기에 난 너무 게으르고 바쁘다. 글 쓰는 것보다 아직은 휴대전화로 가십을 검색하는 게 더 재미있고, 이런저런 모임에서 읽어야 할 책들도 많다.
에휴, 다 핑계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면 되고, TV 드라마를 보면서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었다. 누워서 멍 때리고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푸는 그 시간에 머릿속에 떠오른 이야기들을 글로 쓰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습관 되지 않은 일이다 보니 막상 떠오른 이야기들을 바로 글로 쓰는 것이 낯설고 어색하다. 성격도 한 몫하고 있다. 난 항상 어느 정도 계획이 짜인 상태에서 머릿속 시뮬레이션을 끝내고 나서야 일을 시작하는 사람인데 떠오른 한 줄로 글을 시작하는 게 너무 어렵다. 그래서 시도조차 안 해보고 있다.
운동도 그랬다.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로 집에만 있었더니 몸무게가 10kg 가까이 늘어났다. 신도시로 이사 온 뒤에도 한참 쪘는데 거기서 더 쪘으니 건강에도 비상등이 켜진 것은 당연했다. 운동을 해야지 하면서 머릿속으로 그림만 그렸다. '7시에 나가서 이 코스로 돌면 4km 정도니까 시간이 얼마나 걸리고......' 그러다 막상 7시가 되면 '내일부터 하자' 라며 미루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다가 회사에 있을 때 알던 선배가 달리기 앱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 말로 우선 뱉어 버렸다.
"언니! 나도 그 앱 깔았어요. 친구 맺어요!"
맨날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지워지길 반복하던 나의 운동 계획은 말로 뱉어지고 나서야 행동으로 나타났고 언니와 매일 앱으로 서로의 운동을 격려하면서 일주일에 3-4일은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글쓰기도 그렇게 해보려고 한다. 먼저 계획은 말로 뱉고 우선 쓰자.
난 월, 수, 금요일에 무조건 글을 하나는 쓸 거야!
이제 말로 뱉었으니 아무 글이나 주머니 안의 잔 기억들이 지워지고 껍데기만 남기 전에 우선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