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2월, 대학교 입학을 보름 정도 남겨두고 있던 날이었다. 입학식 전에 입학 관련 서류를 제출하고 과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을 하기 위해서 대전으로 올라왔다. 과사무실로 가서 기숙사 신청 서류와 학적 서류를 제출하고 OT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대강의실에 모여 있는 학생들 대부분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눈만 굴리면서 주위를 탐색하고 있었고 개중엔 분위기를 바꿔보려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고 반갑다고 인사하는 친구(이 친구는 나중에 과대표가 되고 학생회장도 된다)도 있었다. 그렇게 십여분을 기다리다 보니 학과 사무실에서 일하시는 조교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그리고 그 뒤로 두 명의 선배들이 따라 들어왔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곳에 갔다. 그곳에서 세 고릴라를 만났다. 나이 든 고릴라, 작은 고릴라, 빨간 고릴라.
그날 나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세 명의 고릴라를 닮은 선배들.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닮지 않았는데, 굳이 찾으라면 그 당시 조교 선생님은 가수 하림을 닮은 얼굴이었고, 작은 고릴라는 특색 없는 평범한 한국 남자 그리고 빨간 고릴라는......
조교 선생님이 들어올 때 난 같이 들어온 선배들을 살피다가 빨간 고릴라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180cm는 넘어 보이는 큰 키에 근육질은 아니지만 마르지는 않은 몸매였다. 야구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까맣고 짙은 눈썹과 긴 속눈썹을 가진 커다란 눈이 더욱 돋보였다. 피부는 깨끗하진 않았고 동그란 코와 두꺼운 입술은 큰 눈과 잘 어울렸다. 패션 감각도 센스 있어 보였다. 그 시절 자주 보던 패션 잡지에서 흔히 보던 코디였다. 더비 슈즈에 무릎이 다 나오게 찢어진 청바지와 빨강에 가까운 적갈색 폴로셔츠, 팔꿈치는 가죽으로 덧댄 갈색 야구 잠바 입고 있던 그 사람은 내가 입학했던 95년의 학생회장인 우기 선배였다. 옷 잘 입는 세련된 느낌 때문인지 내가 좋아하던 동그란 코를 가진 인상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짙은 눈썹과 큰 눈 때문인지는 몰라도 처음 본 선배의 모습은 나의 대학 생활의 첫 페이지에 한 장의 사진처럼 남아있었다.
나와 같이 다니는 친구들 무리에 과대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과방과 전산실과 과사무실 주위에 항상 머물러 있었다. 강의실 앞 잔디밭에 전시된 비행기 밑에 누워서 낮잠을 자고, 건물 문턱에 앉아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햇볕을 쬐곤 했다. 친구의 일을 돕기 위해 학생회 일을 열심히 돕기도 했지만 주로 학과 주변에 머물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생회 임원들과 친해졌다. 대부분 임원 선배들은 항상 학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과에 가서 조금만 어슬렁 거리면 언제든 학생회장 선배를 만날 수 있었다. 선배도 저녁까지 우리를 데리고 학과일을 하다가 기숙사까지 데려다주곤 했었다. 이성으로 느끼는 감정은 아니지만 우기 선배와 이야기하는 시간들이 편하고 좋았다. 그렇게 나의 대학교 1학년 시절은 학생회장 선배와 95 똘마니들로 불리면서 보내고 있었다.
2학년이 되면서 기숙사를 나와 학교에서 한 블록 떨어진 동네에 자취집을 구했다. 새로 구한 자취집은 선배가 살고 있는 자취집과 같은 동네에 있었다. 학교에서는 천천히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난 버스를 타거나 천천히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너 우리 동네로 이사 왔다며? 언제 집에 가? 정우형도 진모형도 모두 같은 동네야.
"진모 선배한테 들었어요. 동네 모임 하자고 하던데요. 그리고 전 곧 갈 거예요.
"같이 버스 타고 가자. "
"저 걸어갈 건데요."
"걸어서? 그 먼 거리를 걸어서? 안 위험해?
나중에 알았지만 기숙사는 걸어가면서 옆 동네는 걸어가지 않는 선배는 지독히도 걷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몸 쓰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거리 얼마 안 돼요. 다리 하나만 건너면 되는데."
잠시 망설이던 선배는 함께 걸어가기로 했다. 마침 연구실에서 수다 떨고 있던 같은 동네 사는 선배들도 모두 함께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함께 집에 가는 하교 모임이 되었다. 아르바이트 시간을 빼고는 과방과 전산실에서 밤까지 공부하고 학생회 일을 하고 과제를 했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동네모임 선배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있었고 같이 집까지 걸어갔다.
그렇게 걸어 다니면서 선배들을 좀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진모 선배의 연애 이야기, 새 학생회장인 정우 선배의 똘끼 가득한 동아리 생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재미있어했었고, 선배들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들으며 나의 진로도 고민했다. 우기 선배와도 이전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도 선배도 재즈를 좋아했고 김현철과 이소라를 좋아했다. 좋아하는 영화의 취향도 비슷했고 종교나 정치적인 성향도 비슷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쿵작이 잘 맞아서 어느새 만담처럼 떠들고 있었다. 다른 점은 난 운동을 좋아하고 선배는 운동을 싫어했다. 난 술은 잘못 마셔도 편한 사람들과의 술자리를 좋아했고 선배는 술이 싫어서 술자리를 피했다. 둘 다 그림을 그리거나 미술 전시회 보러 가는 것도 좋아했다. 집에 가다가 영화도 보러 가기도 했고, 나중에는 김현철이나 이소라의 콘서트를 보러 가기도 했다.
6월이 되고 진모 선배의 생일이 되었다. 그날도 밤늦게까지 과방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동네모임과 1학년 때 학생회 일을 돕다가 코 꿰인 나의 친구들이었다. 여기에 진모 선배의 동기들까지 더해져 호프집에서 선배의 생일 파티를 하게 되었다. 한참을 술을 마시고 웃고 놀다가 진모 선배가 진짜 궁금해 죽겠다는 듯이 나와 우기 선배에게 물었다.
“야! 내 생일이니까 나 솔직히 듣고 싶다. 너네 무슨 사이냐?”
“얘네 사귀고 있는 거 아녔어?”
“아니에요. 형. 은정이가 우기 선배를 쫓아다니고 있는 거예요.”
“아니야. 진모야. 우기가 은정이 쫓아다니고 있는 거야. ”
선배들도 내 친구들도 여기저기서 말을 보탰다.
“에이! 좋아하는 후배지. 잘 맞고 좋아하는 후배.”
“맞아요. 같은 동네 사는 선배죠.”
우리는 별 사이 아니라며 변명했다.
진모 선배는 동기들과 2차를 가고 각자 집에 갈 사람, 더 공부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나와 우기 선배는 술도 마셨고 날도 좋아서 또 걷기로 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둘 다 다리를 건너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다리를 다 건너고 동네 초입의 공원에서 선배가 입을 열었다.
“우리 저기 좀 앉았다가 가자.”
늦은 밤도 아닌데 그날따라 산책하거나 운동하는 사람도 없고 주위 도로에서 달리는 차 소리만 들렸다.
“아까 난처했지? 근데 나도 요즘 좀 헷갈렸어. 우리는 무슨 사이인가 하고.”
“저도 좀......”
“난 불편한 것도 싫고, 너처럼 좋은 후배도 잃기 싫다.”
“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계속 이러고 다니면 사람들이 계속 놀려서 너도 더 난처해질 거야.”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런데 넌 정말 좋은 후배고......”
'아우, 답답해!'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래서요. 어쩌자고요. 같이 다니자고 말자고....”
“아니. 사람들이 계속 사귄다고 오해하니까......”
“아, 그럼. 사귀던가!”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 키스를 했고 첫사랑이 생겼다.
“여보. 일어나. 거실 바닥에서 이렇게 자지 말고 들어가서 자자.”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드르렁쿠어”
25년째 내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남자는 밤 11시가 다 되어 퇴근을 한 후 내가 글을 쓰는 사이에 TV로 캠핑 유튜브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25년 사이에 두배 가까이 몸무게가 늘어 100kg이 훨씬 넘는 남편을 깨워서 침대로 보내는 건 오늘 내가 해야 하는 마지막 미션이다. 아마 남편을 깨우기 위해 난 몇 번 더 큰소리를 내야 하고 남편은 잠에서 깨지 않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짜증과 어리광을 섞어서 투덜거리다가 침대로 갈 터였다.
남편을 깨우기 전에 남편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동글동글한 코도 여전하고 짙은 눈썹도 여전하고 긴 속눈썹을 가진 커다란 눈도 여전한데 참 많이 늙었다. 여전히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비슷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아직도 남편과 이야기하는 것이 제일 편하고 재미있다. 나란히 앉아서 뉴스나 드라마를 보거나, 둘이서 산책을 해도 25년 전 밤,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가던 그때처럼 우린 쉬지 않고 수다를 떤다. 아까 본 뉴스에서 보면서 생각한 것들이나 서로 낮동안 있었던 일들도 이야기하고, 아이들에 대한 걱정도 같이 하고, 특별한 일 없이 지극히 평범한 날이어도 계속 오늘 하루를 이야기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선배라고 부르던 시절, 같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계속 그렇게 서로의 하루를 공유해왔었다. 선배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박혀버린 날, 본능처럼 이 남자와 평생을 함께 하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나 보다. 언젠가 남편이 말했다.
“아마도 그냥 엄마가 가라는 학과를 갔으면 내가 다른 대학으로 갔겠지? 그럼 널 안 만났을 텐데.”
“그래서, 지금이 싫다고?”
“그건 아니고......”
“걱정 마. 오빠가 다른 대학교로 갔었다면 나도 같은 대학, 같은 과를 썼을 거고, 우리는 내가 입학할 때 만나서 집까지 걸어 다니다가 사귀고 지금이랑 똑같이 사랑하며 살고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