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어떤 폭력 앞에서
얼마 전에 달달한 로맨스 드라마 한 편이 종영되었다. 故김주혁과 엄정화가 주연이었던 영화를 다시 드라마로 리메이크한 것이었다. 그 영화도 좋아했었지만,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선 딸들과 나란히 앉아 보기에 좋아서 드라마 종영까지 본방 사수를 했었다.
그러나 로맨틱 드라마의 따뜻함과 말랑말랑함의 아쉬움이 생겨나자마자 드라마 주연이었던 K의 스캔들이 터졌다. 대형 포털에서 운영하는 익명게시판에 그의 전 여자 친구인 A가 1년 전 있었던 일을, 어찌 보면 은밀해야 할 사적인 연애사를 일방적으로 폭로하는 글이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K와 사귀었는데 그는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과 동료 배우들을 욕하고 험담했으며 명품에 중독되어 있었고 자신의 부주의로 여자 친구가 임신을 하자 낙태를 종용한 뒤 낙태 후에는 A를 버렸다는 것이었다. 내용의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낙태종용'이라는 단어의 언급만으로도 선한 이미지로 라이징 스타가 된 K는 나락으로 떨어질 판이었다. 거기에 더해 A의 글에서 묘사된 일상의 K는 막장드라마에나 나옴직한 비겁하고 악랄한 모습이었다.
증거도 증인도 없는 익명게시판의 글이 공개되고 나서 각종 신문이라고 불릴 수 있는 매체들 뿐만 아니라 유사 언론이라고 간주되는 유투버, 블로거, 인플루언서들도 자신의 페이지로 폭로 글을 옮겼고 일부 광고주들은 뉴스가 나오자마자 K가 등장한 광고를 내렸다. 그랬더니 또 광고주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이미 K에 대한 검증이 끝나서 손절한 거라며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모든 언론 매체들이 앵무새처럼 복사해서 붙여놓았다. 그러나 어떤 기사도 인터뷰나 발로 뛰는 취재를 한 내용은 없었다. 익명으로 시작된 게시판의 글을 그대로 보도하고, 거기에 덧붙여진 SNS 메시지나 또 다른 익명글을 덧붙일 뿐이었다. 이미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았고 누가 더 먼저 [단독]을 달고 더 많은 조회를 받는지 대결하는 경기를 보는 것 같았다.
K의 입장 따위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은 당사자를 더 공격하기 바빴다. 미투 운동처럼 범죄 사실을 제보한 것도 아니었고, 모든 것이 사실이라 쳐도 대중에게는 착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성이 더러운 남자의 연애사였을 뿐인데 언론은 칼춤을 추기 시작했고 이를 본 대중은 흥분했다. 코너에 몰린 K는 숨어버렸다. 그 사이 익명으로 시작된 글에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확대되어 재생산되었고 결국은 A의 신상 털기까지 벌어졌다. 이에 A에 대한 2차 가해가 우려된다는 기사들이 우후죽순 터져 나왔고 다시 K에게 그 화살은 돌아갔다.
그런 상황을 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K에 대한 호감도 있었지만 몇 년간 벌어졌던 언론의 비슷비슷한 마녀재판을 보면서 우선 중립을 유지하고 있어야지 다짐하고 있던 터였다.
익명게시판의 원글을 찾아서 몇 번을 읽어보아도 그냥 철없는 연인이 임신했다가 낙태하고 이후에 헤어진, 그저 그런 연애사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미 언론에서는 신상이 밝혀지고 있는 A에 대한 2차 가해를 걱정하고 있었다. 낙태를 종용했다는 이유(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A의 주장인)로 이미 K는 범죄자와 같은 반열에 서버렸다. A의 신상 털기가 진행되니 K의 쓰레기 같은 인성을 증명하는 글이 지인임을 인증하는 사진과 함께 게시되었다. 또 언론들은 그 글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퍼 날랐다. 그러나 곧 지인이 인증하는 사진이 거짓임을 인증하는 글과 K의 선한 학창 시절을 증명하는 글들이 여러 개 올라왔다. 언론들은 처음 폭로 글을 보도할 때 그대로 옮기던 것과는 달리 반박글은 A의 편에서 글의 진위를 의심하는 내용을 덧붙였다. 아직 A 측은 아무런 증거도 내놓지 못했는데 그녀의 폭로를 진실로 인정하는 것 같았다. 결국 사건의 당사자인 K가 직접 나서서 사랑했던 사이이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자신이 미숙했다라며 모든 사실을 인정하며 사과를 했고, A도 용서한다며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며칠 뒤 연예 전문 온라인 신문에서 전 여자 친구의 실명을 밝히면서 두 사람의 첫 만남부터 헤어짐까지, 양쪽 지인들의 인터뷰와 문자메시지를 기반으로 낙태 종용 사건의 전반을 밝히는 글을 썼다. A의 지인조차 K의 편을 들면서 밝혀지는 진실(증거는 내놓았지만 여전히 K 측 입장일 수도 있는)에 여론은 돌아서기 시작했고 한 기자 출신의 유투버는 A의 과거를 파헤쳐 전남편의 녹취록과 이혼, 부적절한 남자관계 등 숨기고 싶은 사적인 내용들을 공개했다. 판세는 역전이 되었다. 일부 언론과 칼럼니스트가 A에 대한 2차 가해와 다 끝난 이야기를 다시 언급하고 수면 위로 올린 기사를 문제 삼으면서 다시 K를 공격했다. 결국 끝나지 않는 진흙탕 싸움이 되었다.
다시 그간의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초반의 언론들은 사실 확인이나 취재 없이 포털에 게시된 글만 퍼 나르며 조회수를 올리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증거를 내세운 기사가 나온 이후에는 해당 언론사까지 공격하며 마치 그동안 자신들이 써놓은 기사를 정당화하려는 듯이 증거가 나와도 K의 "낙태종용"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면서 사설 같은 기사를 써대고 있다.
이 언론들은 이미 대세 배우라는 타이틀을 단 K를 끌어내리는 쪽을 선택하였다. K를 가해자로 설정하고 그의 이름을 언급해서 기사를 쓰는 것이 더 많은 조회수를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K와 별개로 A에게 초점이 넘어가는 순간 대중의 관심은 줄어들게 뻔하기 때문이다. 종료된 사건은 기사로 쓰지 않으면 대중에게는 잊힌다. 이미 끝난 싸움을 왜 다시 언급해서 띄우냐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언론들도 계속 K를 언급하며 조회수를 올리고 있다. 언론이 끝난 싸움이고 이대로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다면, 그리고 취재한 내용이 없어서 제대로 된 기사거리가 없었다면 더 이상 기사를 쓰지 않으면 되는데, 돈이 되는 자극적인 먹잇감을 그대로 덮을 리가 만무하다. 기레기라고 불리는 언론들은. 결국 그들이 진짜 가해자였다.
안타깝지만 이런 기사들의 노출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미리 확인해서 검사를 해도 언론 탄압이 될 것이며, 조회수가 돈이 되는 상황에서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자극적인 제목을 쓰는 것을 막는 것도 자유주의 경제체제하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국민들에게 해당 기사를 클릭하지 말라고 권유하는 것도 언론탄압이고 차별이 된다. 그나마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은 언론들보다는 국민들의 수준이 좀 더 높다는 것이다. 기사마다 달리는 극도의 흥분을 담은 댓글들 사이에 '중립을 지키면서 사실이 확인될 때까지 기다리고 K나 A에 대한 마녀 심판을 하지 말자'는 내용의 글들이 종종 보였다. 희망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하면서 온 국민들의 의식을 개선되길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몇 세대가 걸릴지도 모른다.
몇 달 전 언론의 허위·조작 보도에 대해 최대 5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을 규정한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 개정안이 국회 상임위 소위원회를 통과했다. 물론 이 법이 완전하지는 않다. 언론을 탄압하는 여지를 주는 부분도 있으며, 정부에 의해 언론 통제의 도구로 악용이 될 수도 있고, 실제 가짜 뉴스를 퍼트리는 유투버나 유사 언론에 대한 처벌 부분도 빠져서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짜 뉴스나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기사를 단순히 복사해서 붙여 넣기 기사를 쓰는 일부 언론들을 보면 그 법이 필요해 보인다. 어쩌면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 뒤에서 책임지지 않는 기사만 써대는 기레기들에게는 금전적인 처벌이 가장 현실적일 것 같다. 그래서 이 법의 논란이 되는 부분들이 보완이 되어 가짜 뉴스나 자극적인 내용의 무차별적인 배포로 인해 발생하는 진짜 피해자들이 줄어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