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희는 원래 웃음이 많았다.
어릴 적 사진 속의 그녀는 늘 입을 크게 벌리고 웃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먼저 뛰어나가 고무줄을 잡고, 술래를 정하고, 규칙을 바꾸던 아이였다. 엄마는 “쟤는 성격 하나는 시원시원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집안의 형편이 기울기 시작한 건, 순희가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였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느 날부터 아빠가 저녁마다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왔고, 엄마의 얼굴에서 웃음이 빠져나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동생들만이 천진난만하게 웃고 놀았다.
아빠는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다. 아니, 가부장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는 자신이 가장이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현실에서 가장이 아니게 될수록, 그는 말과 태도로라도 가장이 되려 했다.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집 안의 공기는 무거워졌다.
순희는 말수가 줄어들었다.
활달하던 아이는 언제부터인가 집 안에서 가장 조용한 사람이 되었다. 무언가 말하려다 삼키는 버릇이 생겼고, 방 한쪽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늘어났다.
세 자매는 같은 집에 살았지만 각자의 생존 방식은 달랐다. 동생들은 아직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순희는 알았다. 이 집에서 누군가는 버텨야 한다는 걸.
아빠는 밖으로만 돌았다. 일자리는 오래 가지 못했고, 누군가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늘 분노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집에 있는 시간엔 TV를 보거나 잠을 잤다. 일하지 않는 시간만큼 자존심은 더 예민해졌다.
엄마는 장사를 시작했다. 새벽에 나가 밤에 돌아왔다. 손은 거칠어졌고 허리는 점점 굽었다. 그래도 엄마는 말했다.
“그래도 이 집은 내가 지켜야지.”
그 말은 순희에게도 향해 있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순희는 공부에 매달렸다. 공부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는 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처럼 알았다. 시험 성적표에서 1등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고, 장학금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일찍 배웠다.
밤마다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방 밖에서 아빠의 기침 소리와 엄마의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들이 그녀를 책상에 묶어두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순희는 학원에 나갔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학원으로 갔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문제를 풀어주고, 숙제를 검사했다. 집에 돌아오면 밤 열한 시가 넘었다. 다리는 늘 퉁퉁 부어 있었고, 누우면 바로 잠들었지만 자주 깼다.
월급은 자신의 통장에 넣지 않았다.
고스란히 엄마에게 건넸다.
“엄마, 이번 달 월급이야.”
엄마는 돈을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그 말은 늘 거기까지였다.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를 사주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순희도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하는 순간, 서운해질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딸의 성적과 장학금을 자신의 치장처럼 여겼다.
“우리 큰딸은 말이야.”
술자리에서 그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순희가 얼마나 힘들게 버티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날, 순희는 장학금을 받았다.
그 시절 장학금은 수표로 나왔다. 손에 쥔 수표는 얇고 가벼웠지만, 그 안에는 그녀의 밤과 피로와 절박함이 들어 있었다.
집에 와서 수표를 보여주자, 부모는 잠시나마 환하게 웃었다.
“잘했다.”
“역시 우리 딸이야.”
그때 순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빠… 이번에는 제가 쓰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이 돈에서 조금만 제가 써도 될까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기가 변했다.
아빠의 얼굴이 굳더니, 이내 일그러졌다.
“너가 벌었다고 네 돈이야?”
그는 수표를 낚아채더니, 망설임 없이 찢어버렸다.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순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밤, 그녀는 방에 들어가 찢어진 수표를 테이프로 붙이며 울었다. 테이프 위로 눈물이 떨어져 종이가 울었다.
대학 4년 동안, 순희는 단 한 번도 놀러 가지 않았다.
매달 웬만한 9급 공무원 월급만큼의 돈을 집에 갖다 바쳤다. 불평도, 투정도 없었다. 자신이 무너지면 이 집은 더 빨리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동생들은 자랐다.
그들은 점점 반발심이 강해졌고, 부모의 모습에 분노했다. 결국 각자 집을 떠났고, 부모와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순희는 달랐다.
결혼을 하고 분가를 했음에도, 그녀는 부모 곁을 떠나지 못했다. 몸은 나와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 집에 묶여 있었다.
누군가는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여전히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순희는 가끔 생각한다.
자신은 언제 한 번이라도 자기 인생의 주인이었던 적이 있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