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기억

“사모님이랑 하세요.”

by 겨울

“사모님이랑 하세요.”

겁이 났지만 겁내지 않았다. 나름 침착하게 말했다. 헛웃음까지 나왔다. 몸은 바르르 떨고 있지만 표정으로는 떨지 않았다. 아마도 그랬다.

“한국에 와서 한 번도 안 했어.”

“뭐를요.”

“이거. 섹스”

마지막에 접었던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저한텐 왜 그러세요.”

“볼매잖어.”

며칠 전에 알게 된 볼매라는 단어. 웃기다고 웃어대더니, 정작 알려준 나는 웃을 수 없는 꼴이 되어버렸다.

“돈 주고 하세요.”

“그런 건 안 해. 돈? 미스김한테 돈 주면 되는 건가?”

심장은 벌벌 떨리고 있음과 동시에 헛웃음이 또 나왔다. 기가 차서 어이가 없다는 혀 끌림이었다.

“허, 아뇨. 그 뜻이 아니잖아요. 사장님 얼른 집 들어가셔야죠. 사모님한테 무슨 소리 들으려 그러세요.”

내가 봤던 사모님은 교양 있으며 점잖고 깍뜻하고 온정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도 결국 이런 남편과 사는구나

“미스김만 말 안 하면 돼. 한 시간이면 할 수 있어. 아, 몸이 문젠가? 이제 헬스도 하고 몸도 만들게!”

하겠다는 의지가 넘쳐났다. 미친놈처럼 날뛰지만 않았지, 이미 그는 입이라는 흉기로 나의 모든 정신을 더럽혔고, 협박했다.

“저보다 사장님이 잃을 게 더 많아요. 그리고 그렇게 던지는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어요.”

“내 딸? 아들? 이런 사실 알아도 눈 하나 깜빡 안 할걸?”

“외국에서는 사장과 직원의 관계가 흔한 건가요?”

대답 대신 더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답이라고 하는 소리는 더 기가 막혔다.

“예전 여직원들의 꿈이 뭐였냐면, 해외영업부 남자 잘 만나서 결혼하는 거였어. 내 해외영업부 동기가 있었어. 여직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 여직원 참 괜찮았어. 일도 잘했고 얼굴도 예뻤고, 그런데 둘이 좋다고 만나더니 임신을 시킨 거야. 그리고 해외로 잠수 도피 갔어.”

잃을게 많을 거란 말에 하는 답은 고작 자신의 동기 얘기였다. 그리고 잠수 도피,

“그 말을 저한테 왜 하시는데요?”

대답 대신 나를 음흉한 미소로 바라보던 그는 씩- 웃었다.
무서웠다. 정말 너무 무서웠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피해자가 확실한 지도 혼돈이 됐다. 성희롱, 성추행을 당하면서도 이게 그 상황이 맞나 혼란스러웠다. 이런 상황을 내가 유도한 건가 싶었다. 미친듯한 자괴감이 밀려왔다.

“제가 하고 싶게 만들었나요?”

“아니”

“그럼 단순히 어려서 하고 싶은 건가요?”

“아니”

“그런데 저한테 왜 그러시는데요.”

“말했잖아. 볼매라니까?”

병신같이 아무 말도 못 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걱정의 눈초리와 화가 잔뜩 난 고모는 미쳤느냐고 물었다. 그 상황을 알지 못했지만 이미 아는 듯 한 말투였다.

“그 사장 미친 거 아니야? 너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없었어”

“사장 번호 보내”

“응”

방으로 들어갔다. 코트에 얼굴을 파묻고 미친 듯이 쏟아지는 눈물과 소리를 훔쳤다. 맥주라도 얼굴에 부어버릴걸, 욕이라도 할걸, 녹음이라도 할걸, 신고라도 할걸. 상황은 이미 끝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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