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의 사적인 이야기
"나 학교 못 다닐 것 같아. 자퇴할래."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밀려오는 압박감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대입 준비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나 홀로 멀찍이 떨어진 학교에 배정받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철부지 소녀의 투정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진심으로 절망하고 있었다. 내 꼴을 보다 못한 부모님께서도 결국 자퇴를 허락해 주실 정도였다. 딱 한 달만 다녀 보라는 전제하에.
누구나 새 학기가 설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떨리지만, 그 떨림이 공포, 두려움, 무서움으로 느껴지는 이도 있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는 그토록 새 학기가 오는 것이 싫었다. 어른이 되었다고 갑자기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하지 않았다. 어렵게 구한 첫 직장은 막상 출근 날이 다가오자 도망가고 싶었고, 유럽 행 비행기에 처음 올랐을 때는 뜨자마자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질하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내게 가보지 않은 길은 두려움 그 자체였으니까.
토토는 조용한 밀밭에서 살았어요.
바로 옆에 커다란 도로가 있었지요.
하지만 한 번도 길을 떠나지 못했어요.
그저 밤마다 길을 떠나는 꿈만 꾸었지요.
< 토토와 오토바이 > 중에서
여기 우리 친구 토토가 있다. 매일 밤 떠나고 싶은 꿈을 꿀 정도로 바깥세상을 동경한다. 하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는 그저 바라만 볼 뿐,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다. 토토에게 세상은 이따금 찾아오는 슈슈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가 전부였다.
용기만 있다면 정말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단다
슈슈 할아버지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토토의 세계를 함부로 깨트리지 않았다. 그저 다정한 말로 묵묵히 용기를 주고 기다려줬을 뿐이다. “거 젊은이가 맨날 밀밭에만 있으면 어떡해? 넓은 세상을 봐야 큰 인물이 되지. 라떼는 말이야” 꼰대식 발언에 익숙해진 내게 할아버지의 말이 위로가 되어 다가왔다.
딱 한 걸음만큼의 용기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용기를 충전하는 시간은 저마다 다르다. 초고속 충전이 가능한 이가 있는 반면, 몇 달, 몇 년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이도 있다. 아주 조금씩 마음에 들어찬 불안감을 지우고 용기를 채워야 한다. 물론 새 학기는 그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개학 날이 되면 새로운 교실에 앉아 있어야 한다. 자퇴로 회피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 역시 또 다른 분야의 두려움을 동반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다행인 것은 걱정했던 일은 대체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결국 적응하게 된다. 나 역시 딱 한 달만 버티자고 다짐했던 그 학교에서, 반장으로 3년의 세월을 보냈다. 회사에서는 수년간 근무하며 경력을 쌓았고, 인종 차별과 소매치기로 나를 겁먹게 했던 유럽은 여행의 기쁨을 알려준 시발점이 되었다. 잊지 않고 있으면 용기는 언젠가 가득 찼다. 그것이 무한정 이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곁에도 수많은 토토가 있다.
오래된 동화 속에는 언제나 '새 친구를 만날 생각에 설레 잠 못 드는 친구'가 나왔다. 그러나 분명 어딘가에는 '새 친구를 만나야 하는 두려움에, 악몽을 꾸는 친구'도 있었을 것이다. 여행을 무서워하는 아이, 꿈을 위한 도전을 주저하는 아이. 그리고 또 다른 두려움에 휩싸인 우리가 존재하듯이 말이다.
그저 우리와 같은 이들을 묵묵히 기다려 주면 좋겠다. 슈슈 할아버지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섣부른 말로 두려움을 한심하게 여기지 않아주기를 바란다.
내 마음에 작은 용기를 보내 준 토토에게,
그리고 따듯한 위로를 보내준 슈슈 할아버지에게 이 글과 함께 영원한 작별 인사를 담아 보낸다.
참고서적
- 토토와 오토바이 (케이트 호플러 글, 사라 저코비 그림, 이순영 옮김 / 북극곰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