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지야 May 03. 2021

너네엄마, 지금 김밥20줄째 싸고 있다

"너네 엄마 지금 김밥 20줄째 싸고 있다"


아빠의 목소리에 체념이 담겨 있다. 예상컨대 오늘도 서른 줄을 넘길 것이다. 그 많은 김밥은 전부 오빠 부부, 우리 부부를 합친 어른 넷과 다섯 살, 세 살 꼬맹이 둘의 몫이다.

 


서른 해를 넘긴 김밥의 기억

초등학교 1학년, 첫 봄 소풍날이었다. 묘한 긴장감과 기대감 속에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 통을 손에 들고 있었다. 내 손은 가벼웠다. 엄마가 동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에 맞춰 도시락을 가지고 가겠다는 엄마의 말에 발걸음이 더욱 설렜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친구들의 돗자리가 다 펴지도록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맘씨 좋은 선생님께서 당신의 도시락을 나눠 주셨다. 5월의 시원한 나무 그늘이 마치 한 겨울처럼 쓸쓸하게 느껴졌다. 다시 학교로 돌아오자, 교문 앞에 이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가 도시락을 들고 오다 교통사고가 났다고 했다. 오토바이 뺑소니였다. 학교 옆 병원에 들러 팔꿈치 수술을 앞둔 엄마의 얼굴을 봤다.


"밥 먹었어?"하고 묻는 엄마의 손에서 참기름 냄새가 풍겼다.



몇 년 후, 엄마는 분식집을 차렸다. 즉석 떡볶이가 메인이었지만, 그보다 엄마의 김밥이 더 인기 있었다. 하지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주말 없이 일하던 엄마에게서 나는 영역 밖으로 점점 더 벗어났다. 때마침 나의 사춘기까지 시작되며, 우리 가족은 아니 나와 엄마는 혹독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는 엄마의 품이 필요했고, 엄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어쩌다 식당에 놀러 가도, 김밥을 먹지 않았다. 

잠든 내 얼굴을 보려 엄마가 들어오면 음식 냄새가 났다. 나는 몸을 돌려 이불을 뒤집어썼다.



몇 번의 방황을 거친 뒤, 마침내 엄마는 간호조무사로 자리를 잡았다. 그때부터 종종 새벽에 일어나 김밥을 싸주셨다. 수험생일 때도, 대학에 다닐 때도, 회사에 다닐 때도 그랬다. 결혼을 하고 독립을 하며 자연스레 엄마의 김밥을 잊어갔다. 임신을 했다고 특별히 더 생각나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엄마에게 김밥은, 좀 더 각별한 의미가 담겼던 모양이다. 엄마를 만나러 갈 때면 언제나 김밥을 말아주셨다. 까만 김 속에 둘러 쌓인 갖가지 재료들. 오이, 맛살, 어묵, 달걀, 당근, 햄, 단무지, 시금치를 보면 밤늦도록 볶고 잘랐을 엄마 모습이 떠올랐다.


비로소 그제야 나 역시 김밥에 각별한 애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몸이 아프면 엄마 김밥이 떠올랐고, 한동안 먹지 못하면 우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따금 엄마가 없을 먼 훗날을 떠올리면, 다시는 맛볼 수 없다는 생각에 서글픈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수북이 쌓인 스무 줄, 서른 줄의 김밥이 거대해 보이지 않는다. 왜 이렇게 많이 쌌느냐고 엄마를 타박하지도 않는다. 엄마와 나 사이에 남은 김밥이 얼마나 될까, 그저 아까울 뿐이다.

 



김밥을 둘러싼 반짝이는 호일, 이번에는 그 위에 노란색 스티커가 붙은 것이 보였다. "이건 뭐야?" 하고 물으니 치즈가 들어간 김밥이란다. 


이렇게 나는 또, 살아갈 힘을 얻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레이크가 왼쪽이더라, 오른쪽이더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