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지루해 난 하품이나 해. 뭐 화끈한 일 뭐 신나는 일 없을까.
신나는 노래 top 5에 손꼽는 자우림의 [일탈]을 들으면서도 흥겨움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화끈하고 특별한 일을 찾아 나서는 것도, 신도림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하는 것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저 매일 똑같이 지루한 일상을 보낼 뿐 재미있는 일이 단 하나도 없었다.
좋아하는 일은 없지만, 딱히 싫어하는 일도 없는 요즘의 상태. 그것이 평온이요, 평화라고 믿었다. 이따금 이 진부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가도 다시 지금의 모습으로 되돌아 왔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글쓰기에서 손을 뗀 지도 몇 달이 되었고, 매일 읽는 책도 의무로 남았을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그냥저냥, 그러저러한 모양으로 흐리멍덩하게 살고 있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창조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열심히 활동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지 못하며, 자신의 활동이 옳지 않다고 여기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의 내면에 도사린 완벽주의자이자 심술궂은 비판자이기도 한 검열관(잠재의식의 억압력)이 출동하기 때문이다. (아티스트 웨이, P.46)
그렇게 읽게된 책 속에서 세 단어에 시선이 멈췄다. "내면에 / 도사린 / 검열관" 의아했다. 나라는 존재는 내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응원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자 한번 더 의문이 들었다. 그럼 그동안 '난 안될 거야', '해봤자 뭐해', '아무 소용없어' 하며 무력하게 만들었던 것은 누구지? 이것이 현실이라고 말하며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만든 그 생각은 누가했지?
나였다. 모든 순간이 나였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고 마음먹은 것도 나,
그걸 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던 것도 나.
내 안에 사는 검열관의 짓이었다.
몇 달 전 기억이 떠올랐다. 우연히 '앨리스 달튼 브라운' 작가의 그림을 보게 됐는데 끝내주게 멋있었다. 파란 바다에 반사돼 반짝이는 물결과 살랑이는 바람에 휘날리는 하얀색 시폰 커튼은 갓 스무 살이 된 것처럼 설레는 기분이었다. '이건 꼭 실물로 봐야겠다!' 위풍당당하게 다짐하고 전시 기간을 일정표에 기록해 두었다.
처음에는 아직 기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천천히 보러 가자 생각했다. 이후에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뒤로 미뤘고, 확진자가 늘어서, 너무 더워서 하며 자꾸자꾸 뒤로 미뤘다. 그렇게 석 달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전시 종료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가 됐다. 그때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 갈 시간 없을 것 같은데? 좀 바쁘지 않나?
- 서울까지 언제 나갔다 와?
- 미술전이라니... 원래 관심도 없잖아?
- 꼭.... 봐야 해?
그렇게 전시는 종료 일자를 맞이했다.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함께 찾아주고, 이어나갈 힘을 준다고 믿었던 내 안에 적군이 있었다. 그 존재를 조금도 인식하지 못한 채 당해 버렸다. 그편에 힘을 실어준 것 또한 나였다. 서서히 내 안을 채워가던 무력감이 좋아하는 일이 없다고, 하고 싶은 일도 없다고 믿게했다. 검열관은 사사건건 눈앞에 나타다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내게 스민 새로운 색을 지워나갔다.
검열관에게 빼앗긴 마음을 완전히 되찾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내 안에 나를 배신할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나는 언제나 뾰족한 눈 차림으로 경비를 설 것이다. 그리고 진짜 내 마음이 하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내 편이 되어준 그에게 다정히 말을 건네야지.
"하고 싶어? 해보고 싶어? 그럼 해, 내가 다 이겨줄게!"
덧) 억울해서 찾아본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전시는 운명처럼 한 주가 추가 연장되어 있었다. 한 달음에 달려가 실제로 마주한 그녀의 그림은, 실로 아름다웠다. 아니 환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