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횡성의 작은 시골집에서 하룻밤 묵을 일이 생겼다. 워낙 깊은 산골에 있어 인적이 드문 곳이다. 오랜만에 차가운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바깥에서 식사를 했다. 다음 날에는 아침 일찍 물가에 내려가 잠시 혼자 앉아 있었다. 조약돌 사이사이를 흐르는 맑은 물과 이름 모를 새들의 소리가 정겹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바람에 실려 온 풀 내음을 맡았다. 새벽의 이슬을 머금은 싱그러운 초록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뱉기를 반복했다. 스읍, 후우-. 마스크를 벗고 이렇게 편하게 숨 쉴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몸과 마음 곳곳에 잔뜩 웅크리고 있던 세포들이 오랜만에 산책을 나가는 기분도 들었다. 콧노래가 났다. 긍정의 기운도, 근거 없는 자신감도 마구 솟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로운 자연의 정취 앞에서 나는 완전히 무장해제 되어 버렸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당연시하며 살아왔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우리에게 처음부터 당연한 일은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 숨 쉬는 것은 당연한 일일까?
'하루 아침에...' 누군가는 목숨을 잃고 누군가는 장애를 갖게 된다. 갑자기 직장이나 큰 돈을 잃기도 한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사고가 일어나고, 일상을 누리던 익숙한 공간에서 뜻밖의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지난 6월 광주에서 벌어진 재개발 현장 붕괴 사고도 마찬가지다. 매일 타고 다니던 버스를 타고, 매일 지나다니던 정류장. 그 곁에 있던 사람들 누구도 그 날의 사고를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정말 어느것도 당연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겪은 일은 오늘 내가 겪을 수도 있는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당연하지 않은 일상은 내게도 곧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어제도 오늘도, 내 곁에 있는 많은 것들이 그대로 있어주었기에 가능한 '기적'이었을 뿐이다.
이런 생각들은 내게 유한한 시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계기가 됐다. 그동안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무한에 가까운 영원이라 여겼다. 언젠가 이별의 수순을 밟게 되겠지만, 그것은 까마득히 먼 훗날의 일이라고. 당연히 아이의 학창 시절을, 대학 시절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을거라 생각한 것이다. 아이가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다시 아이를 낳아 키울 때까지 언제나 이 자리에서 함께 할거라 믿었다. 그 사이에 어떠한 이별도 없을거라 확신하면서.
그래서 때때로 아이와의 시간을 지겹게 느꼈다. 매일 반복되는 자동차 놀이도, 역할 놀이도 재미 없었다. 종일 아이에게 시달린 날에는 빨리 아이가 군대갈만큼 훌쩍 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고 그런 거만한 생각을 했다.
나는 풀어져 있던 마음을 다시 꽉 조였다. 그리고 유한한 시간에 집중했다. 내 모든 시간을 아이에게 올인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그 유한한 시간은 '내 삶'에도 똑같이 적용됐기에 아이가 보육 시설에 가 있는 동안 나는 내 꿈을 이루기 위해 해보고 싶던 일을 했다. 그리고 아이가 집에 돌아오면 오롯이 아이에게 집중했다. 똑같은 책을 열 번 읽더라도 늘 처음 읽어주는 것처럼 대했다. 그러다 다시 이 일상이 지겹게 느껴지면 '당연하지 않은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 당연하지 않은 일이 내일 일어났을 때 나는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오늘의 나는 찰나의 순간을 더 소중히 대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매 순간 감사하며 사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저 오늘 있던 일이 내일도 있을 거라는 오만한 믿음을 가진 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당연한 것은 어느 것도 없다는 것을. <일상>이라는 단어에 속아 많은 것들을 당연시 여기며 살아오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