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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망 Dec 09. 2022

테니스공과 다시 마주하다

테니스 코트에서 고군분투했던 이야기

    퇴근 후 나의 일상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왔다. 평소에는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넷플릭스를 시청하는 등 나만의 취미 생활을 즐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만사가 귀찮게 느껴졌다. 내가 해야 하는 일들만 가까스로 해치운 뒤 침대 속에 몸을 파묻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버틸 수가 없었다. 나는 이 같은 무기력의 증상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내게는 일상생활에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나 감정적 피로를 해소할 마땅한 대안이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을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테니스를 다시 배우기로 했다.


    처음에는 테니스 레슨을 다시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테니스는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품이 많이 드는 스포츠다. 게임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개월 동안 적지 않은 금액의 레슨비를 내면서 따로 연습을 병행해야 한다. 재작년 겨울, 나는 반년 동안의 레슨을 통해 곧 게임에 들어갈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그런데 그만 발목을 다치고 만 것이다. 깁스를 풀고 나서는 안타깝게도 레슨을 다시 받을 여건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 직전에 중도 하차한 것이 얼마나 분하고 아쉬웠겠는가. 나는 그동안 테니스를 생각하면 어릴 적에 들었던 엄마의 새된 목소리가 떠올랐다. 집 앞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있는 나를 향해 들려오는 엄마의 ‘밥 먹어어엇!’ 소리 말이다.     


    어느덧 첫 레슨이 다가왔다. 나는 창고에서 꺼내놓은 테니스 라켓과 신발을 들고 코트로 향했다. 이때만 해도 지난날의 공백에 대한 걱정보단 코트를 다시 밟게 된 반가움이 더 앞섰다. 라켓을 손에 쥐고 몇 번 휘둘러보면 내 안에 깊게 잠든 테니스 DNA가 깨어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공은 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들이닥쳤다. 계속 한 템포씩 늦어지는 탓에 나는 공을 맞이할 준비를 제때 끝마칠 수 없었다. 라켓은 매번 거칠게 휘둘러졌다. 테니스 라켓의 탄탄한 줄로 엮어진 면으로 공의 날랜 기세를 쳐낼 순 있었다. 다만 어긋난 타격점에서 맞은 공은 네트 아래로 힘없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또 한 번의 테니스 첫날 레슨이 끝이 나고 말았다.   

  

    그 뒤로 레슨을 받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코치님은 내가 타격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맞은편에서 공을 띄어주었다. 그의 공은 내가 서 있는 쪽으로 그냥 굴러오는 법이 없었다. 나는 그가 타격하는 공의 방향과 궤도에 따라 부산히 코트 위를 뛰어다녀야 했다. 그 순간만큼은 코치님이 얄미웠는데, 그건 공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경우 공은 내게 다가올 듯싶다가도 시야를 가로지르며 사선 방향을 타고 점점 도망쳤다. 그러면 나는 먹잇감을 포착한 매처럼 공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나갔다. 하지만 너무 기세 좋게 달려들면 쭉 편 날갯죽지를 잔뜩 오므린 상태로 라켓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너무 멀어지면 공이 라켓에 닿지 않았다.     


    테니스공과 나 사이의 적절한 좌표를 찾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공의 위치가 시시각각 바뀌는 탓에 타격 준비를 위해 선점해야 할 좌표를 예측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미리 밝혀두지만, 테니스의 안정적인 타격존은 어느 3차원의 특정 공간에 몰려있다. 그러므로 공의 타격점은 내 몸에서 옆으로, 앞으로, 그리고 지면에서의 높이까지 해서 X, Y, Z값으로 이루어진 3차원의 어느 지점이다. 나는 이 타격존의 중심점을 좌표로 정리해보았다. 공과 나 사이의 가로길이를 1이라고 한다면, 공의 안정적인 타격존은 X가 1, Y가 ½, Z가 1의 비율로 떨어진 어느 지점이다. 이처럼 공이 상대방 라켓을 떠난 순간부터 나는 공과의 좌표 싸움에 시달려야 했다.


    적절한 좌표를 확보했다면 이제 스윙 준비에 돌입해야 한다. 테니스공은 내 예상보다 늘 한 템포 빨랐다. 코치님이 타격한 공은 포물선의 정점에서 번쩍인 다음 순식간에 내 앞에 도달해 있었다. 나는 겁먹은 사람처럼 놀라 손에 든 것을 무아지경으로 휘두르지 않기 위해 미리 라켓을 뒤로 빼고 스윙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공이 네트를 넘어오는 순간 공과 라켓 면의 임팩트 지점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라켓은 찌그러진 팔자 모양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가 공의 마중을 나갈 것이다. 내게는 이 마중 나간다는 느낌이 중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타격점이 뒤로 밀려 공이 네트를 걸리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나는 공을 타격하고 난 후의 피니쉬 자세에 늘 애를 먹었다. 임팩트를 완성시키고 허공에 팔이 뜨면 잠시나마 마음의 긴장 상태를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피니쉬 자세는 임팩트를 마치고 팔이 자연스럽게 반원을 그리며 라켓을 쥔 손등을 반대편 귀에 향하도록 안착시키면 된다. 이를 소홀히 했던 나는 코치님으로부터 지적을 받는 일이 잦았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임팩트가 끝나면 공은 이미 떠나 있는 상태일 텐데 어째서 피니쉬 자세에 마지막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나중엔 똥군기 아니겠냐는 생각까지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에 스핀을 넣기 시작하면서 나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피니쉬 자세는 타격이 끝난 직후 공이 힘을 받을 방향을 최종적으로 조정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다.     


    마지막으로, 공을 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기합이 새어 나올 때가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상대방과 끊임없는 랠리를 이어가다 보면 너무 힘든 나머지 라켓을 휘두를 때마다 괴상한 기합 소리가 크게 새어 나온다. 마치 샤라포바 선수가 테니스 경기 중에 내는 소리처럼 말이다. 나는 예민한 성격 탓에 타인에게 날것의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래서 집 밖에선 늘 긴장 상태에 놓여있는데, 이 순간만큼은 거기서 완전히 해방되어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닦으며 숨을 몰아쉴 때마다 몸에 활기가 돋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목적 달성이 된다. 당장 내일까지는 힘내서 하루를 버틸 힘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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