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산책의 즐거움
딸이 어릴 때 저녁을 먹고 나면 한강변으로 산책을 나가곤 했다. 어린 딸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걷는 시간은 소소한 행복이었다. 산책로에서 지나가는 강아지 구경을 할 만큼 하고 나면, 어린 딸은 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나는 옛날이야기도 들려주고, 소설이나 드라마를 각색해서 들려주기도 하고, 더 이상 소스가 없는 날에서 지어내서 들려주기도 했다.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산책을 즐겼던 시간을 딸이 기억하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은 분명 딸의 몸속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제저녁 산책을 하다가 문득 그 시간이 떠올랐고, 누군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이야기 대신 글을 남기지만,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를 들으며 산책하는 기분으로 읽어줬으면 좋겠다.
낮에는 밖에 나가기가 무서울 정도로 뜨거웠는데 그래도 밤이 되면 바람이 제법 선선해서 밤산책을 즐기기 그리 힘들지는 않은데요. 운동화를 신고 아파트를 나서자마자 여름의 소리가 폭포처럼 쏟아집니다. 맞아요. 매미소리입니다. 울음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한밤에 브라스밴드가 연주회를 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아시겠지만, 매미는 대략 한 달 정도 살다가 종족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는데요. 요란하게 우는 것들은 모두 수컷입니다. 짝짓기를 하기 위해서 요란한 울음소리로 암컷을 불러들이는 것인데요. 짝짓기에 성공하면 암컷이 나무속에 알을 낳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여름에 부화한 애벌레는 곧바로 땅속으로 들어가서 나무뿌리의 즙을 빨아먹으며 살아가는데요. 그 시간이 대략 3년~5년, 길게는 17년에 달하는 종류도 있다고 하니까 인내심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애벌레는 땅 위로 올라와 나무에 붙어서 껍질을 벗는데요. 몇 시간씩 걸리는 작업이기 때문에 천적에게 당할 위험이 높다고 해요. 그래서 한밤중에 은밀하게 탈피하고요. 탈피가 끝나자마자 여름임을 실감케 하는 울음소리를 토해냅니다. 본래 매미는 밤에 울지 않았다고 하는데, 도시가 밝아지고 열대야가 심해지면서 밤에도 요란하게 울어댑니다. 덕분에 여름에 밤산책을 나가면 매미들의 합창을 원 없이 듣게 되는데요. 맴맴맴맴 매애~~ 앰 전형적인 울음소리를 내는 참매미, 가장 크고 가장 요란하게 우는 말매미, 가을을 예고하는 녹색 무늬를 지닌 쓰름매미 등 매미는 종류에 따라 울음소리가 다르다고 하는데요. 자세히 귀 기울여 보세요. 조금 다른 소리들이 들려올 겁니다. 매미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이쯤 하고.
제가 주로 밤산책을 나가는 곳은 아파트 뒤에 있는 근린공원입니다. 축구장과 농구장, 배드민턴장이 있고요. 축구장 주변을 뱅뱅 돌면서 걷는데요. 자주 가다 보면 늘 만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천천히 걸으며 긴긴 통화를 하는 사람, 경보하듯이 빠르게 걷는 사람, 벨트백을 매고 느리지만 꾸준한 속도로 달리는 사람, 머리는 백발이지만 몸은 꼿꼿한 어르신까지. 말 한마디 나눠보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걷다가 스쳐 지나면 '오늘도 걸으러 나왔구나' 싶어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산책을 나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소화가 안 될 때, 졸음이 밀려올 때,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화가 날 때, 몸이 뻐근할 때 혹은 아무 이유 없이. 그런데 걷다 보면 이 모든 문제들이 거의 대부분 해결됩니다. 소화도 되고, 졸음도 밀려나고, 분노도 가라앉고 심지어 아이디어도 떠오릅니다. 아이디어가 가장 잘 떠오르는 3곳을 흔히 'Bus, Bed, Bath'라고 하는데요. 저는 산책길인 것 같아요. 왜 공부는 엉덩이로 하고 사색은 발바닥으로 한다고 하잖아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나가는 이유에 따라서 시간과 속도를 조금씩 조절해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인적이 드문 조금 늦은 시간에 나가요.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생각을 이어갈 수 있거든요.
걷는 속도도 상황에 따라서 조금씩 달리하는데요. 운동이나 소화가 목적일 때는 조금 빨리 걷고요. 사색이 목적일 때는 너무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걷습니다. 너무 빠르면 걷기 바빠서 생각이 이어지지 않고, 너무 느리면 잡념이 많이 끼어들거든요. 화가 나서 나갔을 때는 걸음걸이가 들쑥날쑥하는데요. 신기하게도 아무리 화가 나도 1시간쯤 걷고 나면 다 가라앉습니다.
밤바람이 제법 선선하긴 하지만, 그래도 30분쯤 걷고 나니까 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공기도 살짝 무거워진 느낌입니다. 밤 사이에 소나기라도 내릴 것인지 살짝 습기를 머금기 시작한 느낌인데요. 집에 가서 샤워하고 잠자리에 들면 기분 좋게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오늘의 산책은 여기까지. 다음에 또 산책길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