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을 수 없는 직업병도 있더라고요.
<직장에서 직업병을 생각하다>
직업병 하면, 보통 웃긴 사례가 떠오른다.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가정에서도 남편을 혼내거나, 인사성 밝은 서비스 직원이 가게를 나가면서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말하는 등등 직업병은 보통 웃긴 이야기에 등장한다. 하지만 주변에는 웃을 수 없는 직업병도 있다는 걸 내가 걸리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연구소에 다니는 연구원이었다. 갑자기 불운을 눈치챈 건 어느 평범한 평일이었다. 정수리에 더듬이처럼 뻗친 머리카락을 오른손으로 꾹꾹 누르며 짧은 다리로 바삐 걷고 있었다. 한참 전에 미용한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는 이제 끝에만 남아 몇 가닥은 책가방 끈에 걸리고, 나머지는 어깨 뒤로 너풀거렸다. 좀 전에 머리를 누를 때 느낀 찌릿함이 얼마 전부터 엄지손가락에 느껴졌다.
연구소 문 앞에서 카드를 찍고 들어서자, 정체불명의 퀴퀴한 냄새와 햇빛이 차단된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나는 작게 부르르 떨면서 위층 실험실로 올라갔다. 여기저기 연구 노트가 쌓인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주간 업무 사항을 빽빽하게 적은 일정표를 한 손에 들고, 내 실험대로 갔다. 책상 위에는 멸균수가 담긴 튜브, 상온 보관 시약병, 작은 에펜도르프 튜브, 더 작은 PCR (Polymerase Chain Reaction) 튜브, 튜브를 꼽는 렉, 정량 피펫과 팁이 용량별로 있었다.
나는 주로 DNA 실험을 했기에 작은 용량에 맞는 피펫을 사용했고,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며 누르고 떼는 동작을 자주 했다. 일이 몰아칠 때면, 같은 동작을 반복했으므로 종종 이완될 틈이 없어 손이 결릴 때가 있었다. 하지만 한 번 손을 털어주면 괜찮았기에 그날도 풀어줬는데 엄지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아침에 느꼈던 느낌과 같았다.
정형외과를 갔다. 의사는 '왜 다쳤어?'라는 눈빛으로 쏘아본 뒤, 이제는 떨리고 물건까지 떨어뜨리는 내 오른손 사진을 유심히 봤다. 침묵이 길어지자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일하시죠? 어떤 동작을 자주 하세요?"
"연구원이고, 그러니까 이렇게..."
"직업병이네요."
'휴, 난 또 뭐라고. 곧 괜찮아지겠네!' 나는 직업병 소리를 듣자마자 안심했다. 웃긴 이야기에 등장할 나만의 경험이 하나 생겼다고 여겼다. 그때 의사 선생님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건초염이에요. 엄지손가락 두 힘줄이 무리한 반복 작업으로 염증이 생긴 거예요. 바로 치료해야 하는 상태고, 손을 쓰면 안 돼요. 심해지면......"
손을 쓰지 말라는 의사의 말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월세와 생활비, 통신비, 보험료가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DNA 작업을 하는 내가 비싼 돈 주고 DNA 주사를 맞았고, 보호대까지 감싸고 집으로 돌아왔다. 매주 와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무시한 채 진통제로 버텼으나, 오른손 때문에 힘이 쏠린 왼손까지 건초염이 걸리자 심각성을 인지하고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주변에 알리지 않고 연구소에 다닐 때,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즘 어깨가 아픈 거 같아요."
"저는 팔이 뻐근해요."
"손목이 자꾸 아파요."
출퇴근하면서 사람들의 아픈 곳도 비로소 보였다.
버스를 탈 때 슬쩍 본 보호 밴드를 찬 기사 아저씨의 손목,
매일 풀을 뜯으러 다니는 할머니 군단이 콩콩 두드리는 허리,
30대 남자가 길거리를 청소하다가 이리저리 돌리는 목 등등.
주변에 웃을 수 없는 직업병에 걸린 사람이 이토록 많다는 걸 몰랐다. 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것들이 내가 아프고 나서야 보인다니 씁쓸했다.
이제 물리치료 효과로 제법 통증이 줄었다. 그래서 가끔 직업병 얘기가 나오면 고통을 까먹고 웃을 때가 있다. 하지만 전과 달리 웃은 죄책감을 덜고자 조심스럽게 한 마디씩 하게 됐다.
"웃을 수 없는 직업병도 있더라고요."
누구도 아프지 않길 바란다. 오늘도 애쓰느라 '웃을 수 없는 직업병'을 앓고 있는 당신에게 작은 위로를 보낸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