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한테 편지를 몇 장 썼어요.
생각해보니 몇 장이 아니군요.
편지를 다 모으면 한 권의 책이 나올 것 같아요.
나는 엄청나게 수다쟁이였나 봐요.
그런데 당신은 나를 목석으로 알아요.
우리 사이에 서로를 이해하는 간극이 이렇게 큰 이유는
역시 전달되지 않은 그 책 한 권 때문인가 봅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나는 편지 쓰는 것을 잊어
당신과 나 사이의 간격은 책 한 권으로 끝날 테지만
내가 여전히 당신과 만나
끊어지지 않고 이 인연이 이어지는 날에는
그 책이 한 권이고 두 권이고 쌓일 테지요.
그러는 만큼 우리 사이에 이해하지 못한 오해도 하나둘씩 쌓여
결국은 무너져
우리 사이의 관계를 파괴할 거예요.
내가 만약 이 편지들을 당신에게 부쳤다면
이 이야기의 결과가 달라졌을까요?
글쎄요 그건 모르죠.
하지만 나는 같았을 거라고 봐요.
당신은 말하는 사람이에요.
나는 쓰는 사람이죠.
다행히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배워서
서로 듣고 읽어 해석할 수 있지만
엄연히 그사이에 차이가 있죠.
하나의 단어가 각자마다 다르게 해석되는 것처럼
말과 글 사이에는 많은 간극이 있어요.
이를테면 말이에요.
말은 사라지지만 글은 사라지지 않죠.
말은 잊히고 왜곡되지만, 글은 쓰인 날로부터 그대로예요.
나와 당신이 다른 까닭은 여기에 있죠.
왜 나는 말하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했던 걸까요.
나는 말하는 사람들의 강력함을 많이 보아요. 일상을 살면서 그들의 강력함을 매일 체험하죠. 아무도 공들여 읽지 않는 시대에 태어나서 나의 글은 서류 더미 사이에 묻히고, 즐거운 동영상 뒤에서 먼지가 쌓이고, 데이터화 되어 전산상의 어딘가로 흩어져요.
당신의 말은 매일 많은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내 글은 당신 한 사람조차 변하게 할 수 없네요.
나는 무력해요.
매일같이 글을 쓰며 무력함을 느끼죠.
이 글이 어디로 가게 될까요. 살아는 있을까요.
쓰였지만 잊혀지는 글 더미 사이에서 나도 같이 잊혀요.
하지만 나는 오늘도 또 당신에게 편지를 쓰네요.
도착하지 않을 편지예요.
언제 우리가 또 만나서 같이 즐겁게 웃으며 마주 볼 때에
나는 또 말하지 못하겠죠.
당신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가 이만큼이나 있다고
그 안에는 당신에 관한 것과 나에 관한 것과 이 주변 잔잔한 일상에 관한 것과 날씨와 차의 향기와 져버린 꽃과 매달린 열매와 곧 닥쳐올 겨울과 당신은 당연히 맞이하곤 했던 그저 그런 밋밋한 일상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언어로 빼곡하게 적혀 있어요.
내가 수를 놓았어요. 내가 평생 수 놓는 것을 배운 사람처럼. 내가 온 힘을 다해서 그 글들을 썼죠. 하지만 당신은 뭐 이런 일에 시간을 썼을까. 말로 한마디 했으면 될 것을. 이라고 생각할 것이에요.
딱 한 번, 정성을 다해 읽어줬을지 몰라요. 당신은 친절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또 금방 잊겠죠. 당신은 해야 할 말이 아주 많으니까.
내 손은 종이 위에 잉크로 흔적을 남기지만
실상 나는 당신의 마음에 이 말들을 새기길 원해요.
잊혀지지 않게 지워지지 않게 하고 싶어서요.
내 글이 당신 안에 새겨질 그럴 날이 올까요.
나는 변하지 않고, 미세하게 닳아 가요.
그러다 사라지죠.
글도 같이 사라져요.
하지만 덮고 누워 쉴 수백 장의 종이를 만들어 낸 것은 후회하지 않아요.
이 종이들로 한겨울에도 따뜻할 종이집을 만들래요.
내 편지 안에는 온갖 따뜻한 것들이 들어 있으니까 그곳은 분명 따뜻할 거예요.
거기엔 노래들이랑 황금빛 석양과 당신이 나에게 타 준 따뜻한 코코아와 쿠키가 있어요. 글로 적힌 것 잊혀지지 않아서 늘 거기에 그대로 있어요. 그래서 나는 몇 번이고 열어 그것을 꺼내어 먹어요. 어때요 꽤 괜찮은 겨울이 될 것 같지 않나요?
다른 것들도 있어요. 꽃놀이를 갔었는데 여기에 당신은 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을 보여주려고 내가 자세히 적어놨어요. 여기부터 읽어보면 될 거예요. 꽃잎이 흩날렸다는 부분부터요. 보여요? 당신도 아는 장소예요.
우리 이렇게 같이 이 책으로 만든 도피처에 앉아 행복한 글들을 잔뜩 읽다 보면 추운 겨울은 금방 갈 거예요. 작년 겨울 기억나요? 기록적인 추위였어요. 겨울 내내 두꺼운 양말을 벗지도 못할 정도로요. 하지만 올해가 더 추울 거래요. 매년 그래요. 매년 더 추워지니까. 나는 매년 더 따뜻한 글을 준비해둘 거예요. 다시 돌아올 더 추운 겨울을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나는 지금부터 글을 따뜻하게 데워놔야겠어요. 코코아 어때요? 겨울 독서에는 코코아가 정말 최고죠. 미리미리 주문해 놓을게요. 당신만 오면 돼요. 당신만요.
사실은요. 당신은 이미 와 있어요. 매년 겨울을 나와 함께 보냈어요.
당신 없는 기억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래서 당신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잔뜩 쓰다가 보니 어느새 당신 없이 보낸 날이 단 하루도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나는 이번 겨울도 당신과 함께 보내기를 바라요.
나는 초대장을 쓰죠.
그리고 깨닫죠. 내가 또 보내지 못할 편지를 썼다는 걸
왜 보내지 못할까 당당하게 한 번쯤은 전해줄 수도 있는데
나는 그렇게 용기를 내서 당신을 만나요.
그리고 이야기를 나눠요.
그리고 나는 우리 사이에 다시 엄청난 간극을 보아요.
내가 편지를 보내는데
그 거리가 너무 멀어서
당신이 내가 뭘 건네는지 알아차리지 못해요.
그러다가 놓친 편지가
우리 사이에 그 크고 넓은 협곡 아래로 휩쓸려 사라져요.
당신은 그동안 하고 싶던 말을 끝내고 행복해해요.
당신이 행복하니 저도 좋네요.
당신의 행복한 얼굴을 보다가 나는 또 결국 편지를 놓쳤네요.
이번엔 중요한 초대장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알고 있어요. 당신이 내 글을 기뻐하며 읽어줄 거란 걸.
근데 그 지점이 어디까지일까요.
당신의 따스함과 친절함이 내가 아는 그 지점과 같은 곳일까요.
아니면 더 멀까요. 아니면 더 가까울까요.
나는 거북이처럼 당신에게 다가갔다가, 나의 다가옴에 놀라는 당신 표정에 참새처럼 날아 도망가요.
간 것보다 더 멀리 후퇴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지금 당신의 얼굴을 볼 수가 없거든요.
꽤 오랫동안 보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난 아직도 도망치는 중인가 봐요.
보고 싶은데 이상하죠. 입이 떨어지지 않아요.
당신도 내가 보고 싶다고 했는데 나는 당신을 볼 엄두도 못 내겠어요.
늘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를 재며 그 사이에 편지를 떨어뜨려 놔요.
언젠가 당신이 그 편지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걸어오다 보면
나에게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첫 편지만 잘 도착하면 돼요.
내가 보낼 거예요. 그때와 장소는 알 수 없지만 만약 편지 한 장을 받게 되거든
그것은 엄청난 용기가 들어 있다는 것만 알아줘요.
그럼 언젠간 도착할 이 편지를 이만 줄일까 해요.
당신 손에 도착하거든 기쁘게 읽어주길 바라요.
답장이 어려우면 나에게 직접 와서 말해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럼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