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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나 Apr 29. 2020

작은아씨들 - 따뜻한 추억과 차가운 현실의 만남

따뜻하고 밝은 추억과 차가운 현실이 만난 지점에 놓인 한 권의 책


어렸을 때 좋아했던 책이라, 두 번도 읽고 세 번도 읽었던 것 같다. 대략 등장인물의 이름은 다 기억이 나고, 자매들이 생기발랄한 일화들이 가득했던 것은 기억나는데 그 결말이 기억나지 않았다.


어떻게 되었더라.

추억을 돌이켜 보면 아름답기만 한 것처럼, 영화를 보기 전 어릴 때 읽었던 작은아씨들의 책 내용은 아련하게 채색된 그림처럼 딱 어딘 가에서 멈춰 있었다. 회상을 멈추고 영화를 플레이했을 때 나는 딱 내가 추억했던 황금빛 상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스크린을 보게 되었다.


행복한 바다 나들이




따뜻한 황금빛의 어린 시절 이야기


네 자매의 어린 시절은 아름답고 활기차고 온 배경이 황금빛과 따뜻한 갈색 렌즈를 끼운 것처럼 반짝거렸다.

배고프고 넉넉지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연극을 만들고, 더 가난한 이웃을 돕고, 가난조차 하나의 놀이처럼 아이들은 견디어 나간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조가 주인공으로써 그려지는데 항상 수많은 연극을 써서는 아이들을 초대하여 연극을 벌인다. 나중엔 그 연극에 옆집 남자애 로리도 합류하게 되는데 그 장면 또한 익살스러워 웃음이 터졌다.


그 와중에 의상이 정말 끝내주게 예쁘고 멋있어서 자꾸 눈이 간다. 시골 소녀들의 솜씨가 아닌데? 너흰 옷가게를 열었어야 해.



그 와중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대고모는 가난한 여자 인생 별거 없으니 돈 많은 집 남자를 만나 시집갈 것을 언제나 강요한다. 지금도 가끔씩 들려오는 이런 말들이 1860년대 미국에서는 더했으면 더 했지, 아니 당연했을 것이다.


어릴 때 원작을 읽으며 대고모를 별로 안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어두운 대저택에 살면서 아직 어린아이들에게 돈을 강조하거나 부모님을 모욕하거나 꿈을 짓밟고 결혼이나 잘하라고 조언 아닌 강요를 하는 이 할머니는 어릴 적 나의 빌런이었다.


하지만 다 커서 이 대고모 할머니를 보고 있자니 한 편으로는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사는 데는 정말로 돈이 든다. 그때는 여자의 경제적 활동이 거의 막혀 있는 시대이니 할머니의 저 조언은 정말 생활에서 나온 진짜 조언이었을 것이다.



"고모도 결혼 안 하셨잖아요!" / "대신 난 돈이 많잖니." - 어르신의 지혜에 나는 무릎을 탁 쳤다.



꿈을 좇아라! 네 꿈을 펼쳐라! 어릴 때에 마냥 옳고 열정을 끓어오르게 하던 이 조언들은 막상 눈앞에 들이닥친 차가운 현실에 어떠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뒤여서 였을까. 꿈을 좇았는데, 꿈을 펼쳤는데 사실 나는 당장 생활비도 벌지 못해 알바 자리를 뒤적거리고 있다. 도대체 내 꿈은 어디 간 거냐고 묻는 나에게 뒤통수를 내리치듯 노력이 부족했다, 너에겐 사실 재능이 없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들린다. 그 순간 나는  내 시간이나 노력은 사실 쓸모없었던 것이었구나 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이따금씩 멍해진다.



작가로서의 꿈을 꾸는 조 - 이 와중에 녹색 벨벳 외투는 참 예쁘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재능이 없음을, 네 노력이 쓸모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미리 이야기해주었다면 지금의 내 현실이 조금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을 이따금씩 한다. 글 쓰는 것 따위 진작에 때려치우고 노력을 다른 곳에 쏟아부어 전문직 쪽으로 방향을 튼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젊음이 다 닳아가는 시기의 나는 여전히 대고모의 조언에도 정신을 덜 차렸는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나의 꿈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빨리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기술을 배워서 입에 제대로 풀칠을 하며 안정적인 기반을 닦아야 하지 않을까. 하며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더 이상 꿈에서만 살 수 없는 때가 온다. 이 영화는 이 것을 어둡고 푸른 정말로 꿈에서 깨어나 닥쳐와 버린 현실을 꿈 사이에 교차하여 보여준다.






어둡고 푸른 현실의 이야기


가난하지만 따뜻한 어린 시절 추억 사이로 끼어드는 차가운 현실은 마치 렌즈를 뒤집어 끼운 것처럼 푸른빛과 어두움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시각적으로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이 영화의 교차 진행방식은 동화 속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작은 아씨들을 비춘다.


현재의 풍경은 더 이상 부드러운 동화 속 풍경이 아니었다. 마치 현실을 살고 있는 나처럼 금전 문제에 쫓기고, 가족에서 독립하기 시작하고, 마냥 같이 있을 줄 알았던 언니가 결혼을 하고, 조카가 생기고, 장례식을 치르고 하는 그 일련의 사건들이 정말 내 일상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푸르고 어두운 현실 - 죽어가는 베스, 가난에 쫓기는 메그, 꿈을 이루는데 실패한 조



열병으로 죽어가는 엘리자베스, 가난에 허덕이는 메그, 그리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뉴욕으로 떠났다 실패하고 돌아온 조에 이르러서는 약간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다. 꿈을 포기하고 로리와 결혼까지 생각하는 조를 보며 아니 이건 거의 나잖아 하며 쿠션을 끌어안고 보게 되었다.



현실과 꿈에 부딪힌 자리에 서 있는 조


특히, 작가 지망생으로 고군분투하는 조의 모습이 나와 같아서, 현실과 타협하고 자극적인 글을 써보기도 하고, 실제로 쓰고 싶은 글이 죽어버리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서 집으로 귀환하고. 자신의 글에 솔직하게 비판하는 사람에게 악을 쓰고 밉다고 하는 그 모습까지도 철없으면서도 너무나 왜 그러는지 알겠어서 같이 마음이 쓰렸다.


이렇게 차가운 현실이 꿈을 두드려 대는 영화 중후반에 이르자, 나는 현실에 빚을 지게 만든 꿈이 너무나 싫어졌다. 역시 꿈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일단 안정된 내 집을 장만하기 위해 돈벌이가 될 만한 것에 집중해야겠다. 같은 생각을 나는 팝콘 대신 곱씹고 있었다.




그리하여 책이 만들어진다는 결말

마침내 베스의 죽음으로 4 자매라는 완벽학 사각형의 한 틀이 허물어진다. 베스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조에게 말을 한다. 언니가 쓴 글이 읽고 싶다고. 우리 이야기를 써달라고. 그렇게 베스가 죽은 후 조는 미친 듯이 작업에 들어간다.


푸르고 어두운,  찾아오고야 마는 현실에서 베스는 열병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밤낮없이 글을 써 내려가는 조


마지막은 정말 영화처럼 흘러간다. 그렇게 아무도 읽고 싶지 않을 꺼라 했던 여자아이들의 소소한 일상을 쓴 글은 거절 끝에 결국은 출판된다. 나중에는 저작권까지 사고 싶다는 편집장의 제안을 거절하는 조의 야무진 말이 너무나 좋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책이 출간되는 과정이었다. 더 정확히는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종이를 자르고, 활자를 모아 인쇄판을 만들고, 롤러로 잉크를 바르고, 찍어내고, 페이지를 실로 엮고, 가죽을 잘라 책을 장정하고. 그리고 마침내 금박으로 제목을 찍어내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ASMR 영상처럼 흘러갔다. 보기만 해도 책 냄새가 나는 것 같은 그 광경은 작가로서 가진 하나의 로망을 영상으로 집대성해 놓은 느낌인데, 두 번 돌려봐도 감탄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리뷰를 마치며

나는 이 이야기의 결말이 조의 결혼이 아니라 책의 출판으로 끝나는 것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사실 대고모가 유산으로 남긴 저택을 학교로 개방한 모습을 짤막하고 발랄하게 보여주는 것이 마지막 장면이지만 사실 책을 만드는 과정이 내 눈에는 더 인상 깊게 남았다.


그런 관람자의 마음을 파악했는지 그레타 거윅 감동은 다시 황금빛으로 돌아온 렌즈로 경쾌하게 학교 이곳저곳을 비추다 마지막을 학교 테이블에 놓인 붉은 장정의 '작은 아씨들'이라는 책으로 마무리한다. 그 책을 둘러싸고 모두가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 장면은 정말 소소하지만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었다.




나만 보기 아까운 스크린샷


가난한 가정교사의 부인이 된 메그는 매일 현금 출납부를 들여다보며 한숨을 쉰다.


아름다웠던 베스를 추억하며...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 작가와 작가 지망생 : 책이 만들어지는 장면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영상에서 책냄새가 나요.

- 1860년대 미국의 패션을 보고 싶은 사람들 : 모든 장면이 아름답게 나옵니다.

- 꿈과 현실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젊은이들 : 공감하며 볼 수 있습니다.


별 5/5

저는 개인적으로 출판 거절 메일을 잔뜩 받은 날 다시 돌려보려 합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sonypictures.com/movies/littlewomen
https://www.vanityfair.com/hollywood/2019/06/exclusive-first-look-greta-gerwig-and-saoirse-ronan-little-women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5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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