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오늘은! 참았다.

십 대와의 동거

by 영웅

"수학문제집 가져오너라"


건조기에 빨래를 꺼내며 '이리오너라' 같은 주문을 외워본다.

둘째는 주문이 먼저였는지 본인이 먼저였는지

이미 책상 앞에 앉아 수학문제집을 두어 문제 풀고 있다.


첫째는 아직도 아까 보던 만화책을 펼치고는 소파에 앉았다.

일어나서 방으로 가나 싶더니 화장실로 들어간다.


둘째가 문제집을 다 풀었다고 고단새 가져온다.

빨래를 개다가 "벌써!?" 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고생했어요. 매기는 건 내일 엄마가 매겨놓을게~"

둘째는 끄덕이고 문제집을 가져다 놓는다.


첫째는 아직도 화장실에 있다.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제 방으로 가는 듯하지만

다시 거실로 나온다.

책만두고 방으로 가겠지. 하는 기대와는 무색하게

다시 책을 펼치고 소파에 앉는다.


"동생은 수학 다했는데~"

"아 알았어, 지금 하려고 했어!"


'너 수학해야 되지 않아?'라고 말해야 되는데

동생은 다했다고 말했다.

비교했다.


"모르겠어"

한 문제 풀고는 모르겠다고 콩콩 발망치를 찍어대며 거실로 나온다.

발망치 소리에 내 머리도 콩콩 쳐지는 듯하다.

한번 참는다.


앞에 문제와 똑같은 형식의 문제다.

앞의 문제는 풀었는데 뒤의 문제는 모른단다.


딸의 이름을 부른다.

"위에 문제처럼 풀면 되지 않아?"

"아 그래 알겠어, 까먹었어, 미안해!"

발망치를 찍어대며 다시 방으로 돌아간다.

두 번 참는다.


방에 들어간 딸이 조용하다.

빨래들을 가지고 가본다.

수학 문제집 위로 만화책을 보다가 쓱 넣는다.


얼핏 봐도 아까 풀던 문제 그대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나는 세 번 참을 수 있을까.

나는 어디까지 어른인 척할 수 있을까.


일단 빨래들을 제자리에 두고 이 방에서 나가야 잠시 견뎌낼 수 있다.


샤워를 해본다.

샤워하는 내내 분노에 차오르는 상상을 한다.

'고작 수학한 장으로 저렇게 하다니, 다시는 하라고 말하나 봐라'

'다시는 내가 수학하라고 말만 할 거야'

'두고 보자,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어른되서 후회하고 그때 가서 나 원망하기만 해 봐'


수학문제집 한 장으로 나는 나의 첫사랑을

나의 모든 걸 바쳐 안아준 딸에게

온갖 비극적인 상상을 흘려보내며

수도꼭지와 함께 나의 마음도 함께 잠근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드라이기로 몸을 말리고 로션을 바르고 잠옷을 입는 내내

세 번은 못 참아 더 이상 못 참아 끓어오르는 마음을 잠재울 수가 없다.


딸이 문제집을 들고 슥슥 발을 밀며 걸어 나온다.

"다했어"

불 켜진 거실로 나서며 들리는 그 목소리에 내 마음의 불도 같이 켜진다.


"아이고 다했어!?? 아이고 고생했어!!!, 얼른 일기 쓰고 양치하고 자자!"


나의 모든 비극적인 상상이 막을 내린다.

나의 모든 마음이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세 번 참길 잘했다, 다행이다,

휴 오늘 또 후회할 뻔했다'


결국 참지 못해 화를 내면 후회하는 것은 나뿐이다.

딸이 후회할 것이란 상상을 하지만

실제 후회하는 것은 나다.

실제 비극을 맞이하는 것은 나뿐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내일도 세 번 참을 자신이 없는 채로

일단 오늘은 참았다.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