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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Jun 27. 2018

14. 볼리비아의 첫 번째 친구

2017.4.19. 바예그란데, 볼리비아(D +72)

바예그란데로 가는 콜렉티보에서 파비아나를 만났다.




사마이파타는 갈 때도 그랬지만 나갈 때도 교통편이 그렇게 좋진 않은 곳이었다. 따로 버스터미널이 없어 큰 도시로 나가기 위해선 마을 외곽 버스가 지나다니는 큰길 근처의 식당을 통해 좌석을 예약해야 했다. 심지어 최종 목적지인 바예그란데까지는 한 번에 가는 교통편이 없어 마이라나라는 중간 마을을 거쳐야 했다. 마이라나 행 콜렉티보는 7볼(한화 약 1,400원). 생각보다 승객들이 금방 찼고, 차는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흙먼지를 휘날리며 달렸다. 내린 곳 근처에 바예그란데 행 콜렉티보 사무실이 있었고, 오래 기다리지 않아 차는 또다시 출발했다. 모든 게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5~6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어 보이는 승합차에 승객은 달랑 4명. 내가 오기 전부터 기다리던 아저씨가 운전석 옆에, 나는 숫기 없어 보이는 볼리비아 청년과 함께 뒷좌석에 앉았고, 가장 늦게 왔지만 가장 말이 많은 아저씨는 중간 자리에 혼자 앉았다. 승객이 찰 때까지 더 기다릴 줄 알았는데 그대로 출발. 날이 여전히 더웠고 가운데 자리의 아저씨는 말이 많았지만 자리가 여유로우니 견딜만하다.

그런데 웬걸, 10분이나 갔을까. 달리던 차가 방향을 바꾸더니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나 혼자 어리둥절. 어쩌면 운전사의 말을 못 알아들은 건지, 나머지 승객들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얼마나 지나지 않아 차는 멈췄고, 곧 그 이유도 밝혀졌다. 추가로 태울 손님이 있었던 것이다.


무려 일가족 다섯 명. 여유롭던 차 안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엄마와 막내는 뒷 좌석에 있는 나와 청년 사이에 끼어 앉았고, 아빠와 두 딸은 가운데 좌석의 남은 자리를 다 차지했다. 끙, 갑자기 비좁아진 차 안. 들고 탔던 배낭은 뒷자리 트렁크 쪽으로 밀어 넣어야 했고 엉덩이는 차 문 쪽에 반쯤 얹었다.

햇빛은 따갑고, 덥고 답답했지만 차마 날리는 흙먼지 때문에 창문을 열 수도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전혀 짜증이 나지 않는다. 가던 길 중간에 차를 돌린 것도 모자라 정원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동의도 없이 태웠는데. 만약 한국에 있는 나였다면 말도 안 된다고 항의를 했겠지. 아무리 봐도 모두가 불편하게 가는 길. 그러나 아무도 불만은 없어 보인다. 내가 변한 걸까, 아니면 이 분위기에 동화된 걸까. 아무렴. 이런 게 남미 인지도 모르겠다.


마이라나-바예그란데 콜렉티보를 기다리며. 사무실 앞.

이곳은 교통이 불편한 만큼 여행자들이 많지 않은 시골 마을. 그러니 아마도 개중엔 동양인을 처음 본 사람도 있었을 거다. 이를테면 내 앞자리에 앉아 아까부터 자꾸 내 쪽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저 꼬마 녀석 같은.  


아마 유치원생 정도나 될까. 검은 머리의 공주님이 그려진 분홍색 반팔 티셔츠를 입은 아이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 내 옆에 앉은 엄마를 보는 척하며 자꾸 뒤를 돌더니 이제는 대놓고 나를 쳐다본다. 부끄러운지 인사를 하면 숨는데 금방 또 얼굴을 내민다. 수줍게 인사를 건넨다. 이름이 뭐야? 파비아나. 배시시 웃는데 통통한 볼에 보조개가 살짝. 귀엽다.  

잠깐 쉬어가는 길, 아빠가 길거리 슈퍼에서 팝콘을 사 왔다. 그 조그마한 손으로 한 주먹 푸더니 뒷자리의 동생이 아닌 나에게 나누어준다. 한 손 가득이었는데 내 손에 쥐어진 팝콘은 겨우 서너 개.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빵 터졌다.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한 걸까, 자꾸만 자꾸만 주는 덕에 받을 수도 안 받을 수도 없어 난감하다.

콜렉티보는 중간중간 손님이 내리기도, 추가로 타기도 했다. 가운데 자리가 다시 꽉 찰 때쯤 파비아나는 기어코 좌석을 타고 넘어와 내 무릎 위에 앉았다. 같이 놀다가 자다가 사진을 찍고 하는 사이 시간은 참 빨리도 흘러갔다. 바예그란데에 도착해서야 보니 땀이 흥건. 난 원래 애들도 많이 안 좋아하는데. 오늘 정말 왜 이런 걸까. 아무렴. 정말, 더운 것도 몰랐다.   


바예그란데 중심의 1월 26일 광장. 콜렉티보는 이곳에 우리를 내려줬다.

그날, 한쪽 바퀴가 부서진 캐리어를 끌고 새로 도착한 동네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 어정쩡하게 방향을 가늠하는 내게 도움을 준 것은 파비아나네 가족이었다.

내가 무사히 숙소를 구한 뒤 헤어진 우리는 그날 저녁 동네 시장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어, 저기 익숙한 얼굴들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파비아나는 한마디 말도 없이 곧장 걸어와선 나에게 폭 안겼다. 집 떠난 뒤 처음 느낀 것 같은 따스한 포옹이었다.  

바예그란데를 나가는 차편을 미리 알아보려던 나를 위해 파비아나의 부모님은 또다시 두 팔을 걷어 부쳤다. 버스로, 오토바이로, 콜렉티보로, 마을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내가 가려는 다음 마을인 라 이게라로 가는 길을 여러모로 알아봐 주셨다. 결국 어떤 차편을 이용하더라도 너무 비싸므로 다른 대안을 생각해보자는 결론이 났지만 함께 걷는 동안 부모님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사촌을 만나러 왔다는 가족은 그날 다시 사마이파타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손을 잡고 걸었던 파비아나와 정말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다. 나는 아마도 사마이파타로 돌아가진 않을 것 같다 했지만, 가족들은 그래도 돌아온다면 언제든 꼭 놀러 오라 했다. 다시 한번 따뜻한 포옹을 나눴다. 안녕, 나의 작고 귀여운 친구. 어쩌면 볼리비아에 대한 첫 번째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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