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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Jun 25. 2018

13. 모두에게 좋다고 내게도 좋은 건 아냐

2017.4. 17. 사마이파타, 볼리비아(D +70)

라파즈의 짧은 1박 2일을 끝으로 P와 잠시 헤어지게 됐다. 미션과도 같은 어떤 주문에 급하게 방향을 틀어야 했기 때문이다. 수크레로 떠나는 P와 인사를 나누고 혼자 볼리비아의 동쪽으로 향했다. 동쪽의 큰 도시 산타크루즈는 최근 들어 급속히 발달한 대도시로 볼리비아에서 인구 규모도 가장 크고 경제도 가장 발전한 곳이라고 한다. 우리로 치면 서울에서도 강남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나 나는 그곳을 도착하자마자 지나쳤다. 목적지는 산타크루즈 인근의 작은 마을 사마이파타였다.




'하늘 아래 첫 번째 도시'라고 불리는 라파즈의 1박 2일은 짧고 쌀쌀했다. 동쪽은 이에 비해 고도도 낮고, 날씨도 열대 기후 지역이라더니, 버스에서 보낸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꽁꽁 싸맸던 패딩을 벗고 긴팔 남방도 벗고 티 하나 남았을 뿐인데도 창 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땀이 흘러내린다.  

사마이파타에 가기 위해선 산타크루즈에서 좀 더 들어가야 한다.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이 모이면 출발하는 승합차 '콜렉티보'를 타야 하는데, 버스는 사마이파타 행 콜렉티보 가까이에 있는 터미널이 아닌 멀리 떨어져 있는 새 터미널에서 멈췄다. 버스에서 내려 짐을 찾고, 내내 옆자리에 앉아오며 조금 말문이 트였던 아줌마를 급하게 찾았다.  

"세뇨라(Senora, 중년의 여성을 부르는 말인데 존칭의 표현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나 사마이파타에 가야 하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난 여기가 처음이에요. 도와주세요."

역시나 친절한 아주머니. 옆 사람에게 물어봐 주고 또 택시기사에게도 물어보더니 택시로는 20볼, 그러나 터미널 밖의 정류장에서 미끄로(볼리비아의 시내버스를 부르는 이름)를 타면 2볼이란다. 환한 웃음으로 손을 흔들어주는 아주머니에게 그라시아스(고맙습니다)! 인사를 연발했다. 멀어지는 나를 향해 갑자기 온세(11), 온세,라고 외치길래 버스 요금을 잘못 알려줬는가 했는데 정류장에 가서야 그게 버스 번호라는 것을 알았다.


버스 정류장에 가니 자기 덩치만 한 배낭을 메고 있는 한 여자애가 정류장에 멈추는 버스를 온통 붙잡고 뭔가를 계속 묻고 있다. 직감이 왔다.

"너 혹시 사마이파타에 가니?"

"응. 지금 버스를 알아보고 있어. 너도?"

"11번 버스를 타면 콜렉티보를 타는 곳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대."

프랑스에서 온 레니는 사촌언니가 있는 이곳으로 2달간의 여행을 왔다고 했다. 하얀 얼굴에 주근깨, 연한 갈색의 웨이브 진 단발머리의 그녀는 내가 스페인어를 잘 못한다고 하자 말이란 계속할수록 느는 거니까 그래도 열심히 해,라고 말해주었다. 참 매력적인 친구였다.

버스에 내려서부터 레니를 만나기 까지 다 잘 풀리고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함께 콜렉티보를 타고 사마이파타에 잘 도착한 뒤 레니는 내가 차에서 캐리어를 꺼내는 사이에 인사도 없이 성큼성큼 마을 사이로 사라졌다. 뭐지? 내가 뭔가 잘못했나? 아니면 유럽애들은 다 저런 건가? 나는 아직 숙소도 아무것도 정하지 못한 터라 레니를 따라가 볼 생각이었는데....

 

사마이파타는 아주 작은 시골마을. 고대 문명의 암벽화가 발견되어 관광지로 명성을 타게 되었다고 한다. 포장된 도로보다는 흙길이 더 많고, 건물은 높아야 2,3층 정도 규모. 열대지역다운 후덥지근한 날씨에 마을은 온통 초록이 우거진 여유롭고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 누군가는 사마이파타를 '히피들의 천국'이라고 했다. (나는 아직도 히피가 어떤 친구들인지 잘 모르겠지만) 도시 문명보단 자연을 좋아하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팔찌 등의 수공예품을 만들어 길거리에서 팔고, 밤낮으로 모여 기타를 치며 노래도 부르는 그런 아이들이 히피라면, 확실히 많아 보이긴 했다.

그래서일까 이곳은 여유롭고 평화로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동네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사마이파타에 대해 내가 들었던 이야기가 주로 그런 것들이었다. 도시와 문명을 벗어난 한가로운 시골, 자연에 둘러싸인 한갓진 풍경. 그 분위기에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기 어려운 말하자면 여행자들의 개미지옥 같은 곳.

나 역시 그런 기대가 있었다. 이곳을 향할때부터 너무 좋아서 떠나기 싫어지면 어쩌지, 큰 도시에서 날 기다릴 친구도 앞으로의 여정도 팽기치고 눌러 앉게 되면 어쩌지 걱정하고 있었으니. 창문 너머로 풍경이 기가막힌 숙소를 골라 짐을 풀고 늘어지게 한 숨 쉬고 나면, 이곳에 머물고 있는 여유롭고 흥겨운 여행자들과 모두 친구가 되어 금방 이 분위기에 동화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캐리어 바퀴가 터졌다. 아직 제대로 마을에 들어서기도 전이었다. 포장 안된 자갈밭 길 위로 바퀴를 굴리다 생긴 사고였다. 함께 콜렉티보를 타고 온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사라졌고 거리엔 오로지 나 혼자.

갈수록 무거워지는 캐리어를 질질 끌고, 두 손으로 들고, 이고, 지고, 여기저기 호스텔을 찾아다녔다. 그나마 가이드북을 보며 미리 찾아놨던 몇 군데 숙소는 예상보다 훨씬 비싼 값을 불렀다. 이제 와서 그때의 일기를 다시 보니 지금 생각하면 충분히 묵어도 됐을 가격이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미련했는지... ATM도 환전소도 없는 동네에 오면서 현금을 부족하게 챙겨 왔기 때문이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볼 뿐이다.

마을 중심가로 가까워 올수록 조금씩 거리에 사람들이 나타났다. 다행히 또다시 그들의 도움을 받아, 묻고 물어 동네에서 가장 싸다는 호스텔에 겨우 짐을 풀 수 있었다. 호스텔까지는 시장 너머로 과일 껍질 등의 쓰레기 썩는 냄새가 나는 비탈길을 지나 말 그대로 산 넘고 물을 건너가야 했다. 도미토리 1박에 30볼. 우리 돈으로 6천 원이나 될까? 그때까지 남미에서 묵었던 숙소 중 가장 저렴하고 가장 낯선 곳이었다.

긴장이 풀려설까 꼬르륵, 배가 엄청 고팠다. 다행인지 호스텔에는 간단한 식사 메뉴가 있었다. 주인들이 채식주의자라 육류가 들어간 음식은 없다기에 5볼 짜리 에그 샌드위치를 먹었다. 와이파이도 리셉션 근처에서만 된다는 말에 바로 앞에 있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세상에 그런 꿀맛이 없다. 그날 하루 종일 처음 느낀 행복한 기분이었다.

 

사마이파타는 유명하진 않아도 왔던 사람들은 다 좋다고 한 곳이었는데 나는 오늘 하루가 왜 이렇게 피곤하고 힘들까. 좋은 곳 일 거야, 좋아야 돼! 세뇌를 시켰지만 역시 실패였나 보다. 호스텔 마당이 시끌벅적해지는 저녁. 맞아, 여기 재밌는 곳이랬지, 나도 같이 놀아볼까 고개를 내밀었더니 벌써 살짝 눈이 풀린 콜롬비아노 둘이 말을 걸어왔다. 같이 술 마실래, 마리화나 필래, 너 오늘 도미토리 혼자 쓰는 거 같던데.  

피곤해, 일찍 잘래. 문을 닫고, 꾹 걸어 잠그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시계는 아직도 8시. 혼자서 밀린 일기를 쓰다 잠이 들었다.



*남미에서 콜렉티보 이용하기
콜렉티보는 남미에서 정말 흔한 교통수단이다. 정규 노선이 없는 마을로 넘어갈 때, 혹은 도시 내에서의 이동에도 많이 사용한다. 대체로 사람이 7~8명, 많으면 10명 정도까지 타는 승합차에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이 다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한다.
콜렉티보마다 정차하는 위치가 정해져 있지만 여행자는 알기가 어려워 개인적으론 늘 지역 사람들한테 물어보며 다니곤 했다. 차에 목적지가 쓰여 있거나 근처에 눈에 잘 들어오는 간판이 있어서 찾기 쉬운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운전자에게 직접 목적지를 물어보는 편이 빠르다. 인원을 채워서 이동하는 만큼 사람이 모이지 않으면 세월아 네월아 늘어질 수도 있지만, 로컬들이 정말 흔하게 이용하는 수단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잘만 이용하면 정규 교통수단보다 매우 싸고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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