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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Jun 29. 2018

15. 체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

2017.4.19. 바예그란데, 볼리비아(D +72)

이제 볼리비아로 넘어간다 했을 때 아빠가 제일 먼저 꺼낸 말은 "그곳에 체 게바라의 마지막 장소가 있다"는 것이었다. 라파즈에서부터 그 고생을(!?) 하며 바예그란데를 향한 이유였다. 바예그란데는 정확히 말하면 죽은 체의 모습에 세상에 공개된 곳이다.




체 게바라. 20세기를 대표하는 혁명가 그리고 저항의 상징. 하지만 사실 난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냥 관심이 없다고 할까. 여행 초반, 어쩌면 그의 흔적이 곳곳에 가장 많이 남아있을 쿠바에 갔을 때도 체 게바라는 그저 내가 쿠바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시켜주는 상징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혼자서 굳이 이 힘든 길을 돌고 돌아 그의 죽음을 찾아왔다니. 평소엔 아빠 말을 잘 듣지도 않던 내가 말이다.

콜렉티보가 나를 내려줬던 1월 26일 공원(Plaza 26 de Enero) 앞에 박물관과 도서관, 투어센터가 모여있는 건물이 있다. 투어센터를 통해 마을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체의 흔적을 돌아보는 투어 프로그램을 신청했고 오후 2시 반, 가이드 곤살로가 왔다. 뚜리스타(turista. 관광객)는 나, 단 한 명. 걸어서 혹은 택시를 타고 투어를 할 수 있다고 했고, 나는 걸어서 가자고 했다.

지금도 환자가 가득한 종합병원, 세뇨르 데 말타 병원의 세탁실은 현재 철문으로 잠겨 입장이 제한되어 있다.
체의 주검이 전 세계에 공개되었다는 세면대. 세탁실에 온통 그를 기리고 그리워하는 낙서가 빼곡하다.

첫 번째 방문 장소는 체의 주검이 발견된 세뇨르 말타 병원(Hospital Señor de malta). 출발지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 마을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인 듯한 이곳은 지어진 지 100년 정도 되었다고, 지금도 환자들로 가득하다. 체의 주검이 발견된 세탁실은 병원에서도 꽤 안쪽에 분리되어 입구가 잠겨 있었는데, 가이드와 동행할 때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시끌벅적한 소리도 사라지고 조용한 뒤 뜰에 홀로 남겨진 세탁실은 체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흔적이 빼곡하다. 밤낮으로 불쑥 병원에 찾아와 낙서를 남기고 머물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금처럼 따로 관리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곤살로는 세면대 위에 체의 시체가 어떤 식으로 놓여 있었는지 설명해 준 뒤 기념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옆에 서라고 했다. 기념이 될 곳은 맞는 것 같은데, 시체가 발견된 장소에서 찍는 기념사진이라. 이걸 찍어도 되는지, 표정은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엉거주춤한 모습이 카메라에 남아버렸다.



체의 동료 게릴라들이 묻혀있는 곳. 이곳 역시 가이드를 동행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듯 했다.
크고 깔끔하게 새로 지어진, 그러나 아무도 없어서 왠지 쓸쓸해 보였던 체 게바라 기념관.


최초에 주검이 공개된 후 체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30년이 지난 1997년에야 인근 군용 비행장의 땅 밑에서 그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그 위치에 체 게바라 기념관이 올라와 있다.

걸어서 20~30분 정도 떨어진 기념관을 향해 걷는 동안 곤살로와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볼리비아는 일본과 사이가 좋아. 여기에 일본인들도 많이 살고 있어. 그럼 한국은 어때? 글쎄, 한국이나 중국은 그냥 그런 것 같아. 근데 한국은 아이를 많이 낳니? 나는 형제가 12명이야. 정말 많다. 글쎄, 한국은 이제 아이를 잘 안 낳아. 왜? 음... 힘들어서. 아, la vida. 길게 설명하기 어려워 얼버무린 힘들다는 내 마지막 대답에 곤살로는 짧게 라 비다(la vida, 인생)라고 읊조렸다. 왠지 더 말하지 않아도 다 이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념관에 가는 길 중간에는 체와 함께 싸운 동료 게릴라들의 무덤이 있다. 곤살로는 하나하나 그들이 누군지,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지 알려줬다. 기념관은 인터넷으로 미리 찾아봤던 것보다 매우 크고 새 건물이었다. 최근 확장 공사를 진행했다는 모양이다. 워낙 마을에서 떨어진 외진 곳이기도 했지만 공사를 하는 인부들을 제외하곤 아무 안적도 찾을 수가 없다. 해가 구름에 가려서일까, 바람이 괜히 스산하게 느껴졌다.

기념관은 체의 시체가 발견된 땅을 그대로 두고 벽을 세워 지붕을 올린 형태다. 드러난 흙 위로 시체가 발견된 자리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건물 벽에는 어린 시절부터 최후까지, 체의 일생이 담긴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곤살로는 사진을 하나하나 설명해주기도 하고, 내가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조용히 시간을 주기도 했다. 건물을 나와 최근에 새로 지은 듯한 깨끗한 또 다른 건물로 자리를 옮겨 남겨진 체의 유물 등을 돌아보는 것으로 투어가 끝났다.


가이드 곤살로의 뒷 모습. 오늘은 손님이 나 한 명, 어제는 딱 두 명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크고 깨끗하게 잘 되어있는데 왜 이렇게 조용하고 사람이 없어?"

"글쎄."

"볼리비아 사람들은 이곳에 안 와?"

"아마도. 볼리비아 사람들은 체 게바라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그럼 왜 이렇게 큰 기념관을 지은 거야?"

"몰라. 정부가 시키니까."

기념관과 담장을 나누고 있는 비행장을 가로지르면 더 빨리 마을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미처 관리가 안된 듯한 풀이 무성한 들판을 걸으며 곤살로는 이런저런 풀과 나무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체의 시체는 쿠바로 인도됐고, 현재 그의 무덤은 쿠바의 산타끌라라에 있다. 볼리비아에는 사마이파타에서부터 바예그란데를 거쳐 체가 생포되었다는 마지막 마을인 라 이게라까지 '루타 델 체(Ruta del che, 체의 길)'라는 이름으로 트레킹 코스도 있다고 하나 여행자들에게 대중적인 것은 아닌 듯했고, 현지인들에게도 딱히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 같았다. 막연히 체 게바라는 남미의 영웅, 어디에서나 환영받고 누구나 자랑스러워하는 남미의 또 다른 상징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가 마지막으로 싸우다 죽음을 맞이한 곳, 그의 이름이 붙은 길이 만들어지고 기념관까지 세워진 곳에서는 그렇지 않아 보였다.   


코스대로라면 다음 마을인 라 이게라까지 가야겠지만 도저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 이곳은 숙소나 식당, 어디에서도 와이파이를 잡을 수 없어 인터넷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ATM도, 심지어 환전소 하나 찾을 수 없는 시골 마을. 체를 쫓아 라 이게라로 가는 길은 택시가 거의 유일한 교통편인데 남아있는 현금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함께 갈 일행이라도 있다면 택시비가 절약됐겠지만, 오늘 하루 종일 이곳까지 체의 흔적을 찾아온 관광객은 오로지 나 한 명이었다.

어쩌면 나에겐 딱 이 정도,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곤살로가 이 동네는 사과가 유명하다고 했는데, 낮에 봤던 사과 시나몬 빵 노점은 투어가 끝나고 돌아왔을 때 이미 문을 닫아있었다. 그러게, 왜 나는 남들이 잘 오지도 않는 이 길을 굳이 혼자서 돌고 돌아온 걸까. 체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거나 혹은 새삼 감명 같은 것을 받았다고 말할 순 없는 여정이었지만, 그의 인생이 조금은 궁금해졌다.



*체 게바라(Che guevara)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젊은 시절 절친과 함께 오토바이로 떠난 남미 여행을 계기로 의과대학 출신이라는 엘리트 코스를 버리고 혁명가가 되어 싸웠다. 쿠바에서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고,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버린 뒤 또다시 혁명이 필요한 곳으로 향했으니 그곳이 바로 볼리비아. 그러나 산세가 험하고, 부족한 혁명군의 지원 등의 악조건 속에서 결국 볼리비아 정부군에 생포되었다. 생포된 라 이게라에서 바로 다음날 총살당했는데, 그런 그의 시신이 내가 다녀온 바예그란데의 종합병원 세탁실에서 공개되었던 것.
그가 꿈꿨던 볼리비아의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혼돈만 일으킨 비운의 게릴라로 죽음을 맞이해서 일까, 이곳에선 딱히 영웅으로 여겨지지 않나 보다. 큰 도시나 다른 젊은 사람들에겐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가는 길조차 어려운 시골 마을에 뿌려진 쓸쓸한 흔적들. 그냥 하나의 관광 요소로 소비되는 느낌이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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