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판만 더 해!”부터가 시작이다

by 배짱없는 베짱이

"보드게임하러 가자." 지인에게서 문득 연락이 왔다. 우리는 보통 술자리에서나 만나는 사이였다. 먹거나 마시는 거 말고 다른 걸 하자고 연락이 오다니. 그것도 보드게임을 하자는 연락이라니…! 그동안 보드게임이 취미라고 슬쩍슬쩍 흘리고 다닌 게 효과가 있었나. 신이 나서 당장 멤버를 꾸리며 한편으론 어떻게 이 기회를 잘 활용해서 지속적으로 게임하는 만남을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한동안 주변에 같이 게임할 사람이 없는 바람에 보드게임 디톡스를 한 적도 있어서 그런지 보드게임만큼 영업이 중요한 장르도 없는 듯하다. 물론 혼자 할 수 있는 보드게임도 있고 요즘은 온라인상에서도 보드게임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보드게임은 여럿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할 때가 가장 재미있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볼수록 보드게임만큼 영업하기 힘든 장르도 없다. 어쩌면 내가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어른이라선지도 모르겠다. 일단 생각보다 '게임'이란 분야에 관심 없는, 그보단 어쩌면 별로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누군가는 보드게임을 그저 신나게 웃고 떠드는 애들이나 하는 놀이라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그 반대로도 생각한다. 내가 보드게임이란 취미가 있다고 밝혔을 때 마치 철없는 애를 발견한 듯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어디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회사에서 머리 쓰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놀 때까지 머리를 쓰기는 싫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보드게임은 다 머리를 써야 하는 것들이다. 다만 굴려야 하는 머리의 방향이 다르고, 어느 정도 머리를 써야 하는지 그 깊이가 조금씩 다르달까.


보드게임의 난이도는 보통 '무게(웨이트)'로 표현한다. 1점부터 5점까지, 웨이트가 높을수록 쉽게 말해 어려운 게임이라고 보면 된다. 보통 내가 즐겨하고 좋아하는 게임은 대부분 3점대 전후의 적절한 운과 전략이 섞여 있는 게임들이다. 이런 게임들은 대체로 게임에 대한 룰 설명에만 3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리고, 실제 플레이를 하는 데도 2시간 이상 걸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일단 시간도 충분히 확보되어야 하고, 게임에 대한 이해도까지 바탕이 되어야 재미있는 플레이가 가능하달까. 모든 일에는 한 단계 더 들어간 세계가 있다고 하는데, 보드게임도 정말 그렇다. 처음엔 운이나 순발력에 기대기도 하며 웃고 떠드는 게임으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면 복잡하고 심오한 규칙 사이에서 변수를 찾아내고 규칙을 활용하며 앞으로 나아갈 궁리를 하고 있다. 다만 이 단계까지 가는 일이 쉽지 않다. 내가 오랜 디톡스를 깨고 동네 보드게임 카페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 그곳의 많은 분들이 정말 친절하게 30분, 1시간씩 걸리는 게임의 룰을 차근차근 설명해주곤 했다. 목이 다 쉬어버린 듯한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 한 명이라도 이 게임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나는 게 자기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답이 돌아오곤 했다.


함께 술이나 마시던 친구와 보드게임을 하러 간 날, 나는 당연하게도 쉽게 떠들며 웃을 수 있는 게임들을 골라서 하나씩 소개했다. 친구들은 한 판 신나게 하고 나면 "와 재미있었다! 다음 게임!"이라고 외쳤고, 나는 계속 다른 장르의 게임들을 가져가며 이 친구들이 어떤 게임에 좋은 반응을 보이나 살폈다. 그리고 드디어 입질이 왔다. 테트리스 같은 각자의 블록들을 하나의 판 위에 채워나가는 <블로커스>를 하고 난 다음이었다.


"한 판만 더 해." 한 번 더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나. 성공이다. 조금 더 잘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면 이제부터 시작이다. 우리는 한 판을 더했고, 그다음 판엔 또 다른 친구가 한 번만 더 하자고 말을 해서 3번이나 했다. <블로커스>는 룰이 매우 단순하지만 운이 개입할 요소가 적고, 플레이어들 간의 상호작용이 큰 편이라 본인의 블록 운용 전략이 중요한 게임이다. 결국 적절히 머리를 쓰게 하는 게 게임에 흥미를 붙이는 데도 효과적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당연하게도) 세 판 다 나의 승리로 끝났지만 (절대 봐주지 않는다…!) 친구들은 그래도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앞으로도 분기별로 모여서 게임을 하자고, 다음엔 좀 더 어려운 게임을 소개해줘도 좋겠다고 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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