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클럽 MT를 떠나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번 판은 가평이다!

by 배짱없는 베짱이

연초에 했던 말이 씨가 됐다. "나는 늘 처음 해보는 일이 제일 재밌어." 슬슬 백수의 생활을 정리하고 재취업을 하기 위해 회사를 알아보고 이력서를 다시 정리하던 즈음이었다. 왜 직무를 바꾸려냐는 지인의 질문에 저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회사에서 정말로 지금까지 안 해본 업무만 맡고 있다. 그래서 재밌기도 하고 엄청 헤매기도 한다. 입사 3개월까지는 정말, 주말 밤낮으로 일 생각에 (실제로 일도 나가서 했고ㅠㅠ) 정신이 없었다.


일상이 바쁘니 게임 따위(?)가 눈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겨우 시간을 내어 주말에 보드게임 카페에 갔을 때도 머리만 아프고 집중이 잘 안 됐다. 오히려 주변 다른 테이블의 게임하는 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려오던지. 소음 때문에 집중이 안된다며 빠르게 게임을 접고 집에 가버린 적도 있었다.


이런 나날이 올 걸 예상하고 준비한 일은 아니었지만, 7월엔 좀 특별한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HFK 보드게임클럽의 첫 번째 엠티. 한 멤버분의 제안으로 일회성 이벤트처럼 추진된 것이었는데, 한 달쯤 지난 지금 와서 보니 정기 모임이 될 것만 같다.


바로 몇 줄 위에 게임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은 취소. MT 날짜가 가까워 올수록 머릿속이 게임으로 가득 찼다. 과연 어떤 게임을 가져가야 재미있을까? 다 함께 차를 타고 낯선 장소(무려 가평! 숲 속의 펜션!)로 가서 함께 고기도 구워 먹고, 노을 지는 하늘도 보고, 별도 보고, 무엇보다도... 시간의 구애 없이 마음껏 게임을 즐길 수 있다니! 사그라들던 불꽃이 다시 살아난다. 사실 이것 역시 처음 해보는 일이라 더 재미있었는지도 모른다. MT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침 코보게의 지원으로 새 게임 <봄버스터즈>와 <클랭크 카타콤>를 받은 즈음이었다. 최근 멤버들이 협력게임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기에 <봄버스터즈>를 챙기고, 뭔가 다 함께 술 마시는 자리에서 해도 좋을 것 같은 게임이란 생각에 <힛스터>도 새로 구매를 했다. 스포티파이와 연계해서 랜덤으로 음악을 듣고, 연도 순으로 맞추는 게임이다. 사실 정말 시간의 구애 없이 길게 할 수 있는 <데드 오브 윈터>(순전히 좀비물을 좋아하는 내 취향)나 <테라포밍마스>(이제 이 정도 게임은 즐길 수 있을 멤버들이 생긴 것 같아서)도 챙기고 싶었지만... 너무 욕심부리진 않기로 했다. 마침 또 다른 멤버가 <캐스캐디아>를 챙겨 왔다. 너른 초원과 바다, 설산과 숲 등으로 채워진 타일을 챙겨 와 그 위에 서식하기 좋은 동물을 올리는 게임이라니, 도심의 소음에서 벗어나 새소리만 들려오는 숲 속 펜션에서 즐기기에 이만큼 안성맞춤인 게임도 없을 거다.


서울에서 가평으로 가는 길, 우리는 미사리에서 만나 초계국수로 점심을 먹었다. 남한강을 바라보며 커피라도 한잔 마실까 하다가, 그냥 빨리 가서 게임이나 하자고 서둘러 숙소로 핸들을 돌렸다. 가는 길엔 마트에 들러 고기와 술을 잔뜩 샀다.


보드게임클럽을 운영하며 지금도 한 번씩 저지르는 실수가 있는데, 그건 게임을 빨리 시작 안 한다는 거다. 클럽이 한 달에 한 번 진행되다 보니 오랜만에 만난 멤버들끼리 수다타임이 필요할 것 같아 타이밍을 나름 재는 건데, 한 번씩 멤버들이 먼저 물어온다. “우리 게임은 언제 해요?” MT에서도 좀 더 쉬는 시간을 가져야 하나 싶을 무렵 누군가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고, 우리는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여유롭게 게임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챙겨간 보드게임의 종류가 많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사실상 밤새 게임을 했다. 낮 종일 게임을 하다 하늘이 붉게 물들 무렵, 다 함께 나와 바베큐를 해 먹고, 거의 처음으로 멤버들과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 중간엔 <힛스터>도 함께 했다. 아는 노래가 나오면 다들 신나서, 모르는 노래가 나오면 좋다고 찾아보며 꽤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번외로, MT 이후 <힛스터>는 한 번도 다시 안 하고 있다. 뭔가 놀러 간 자리에서 잘 어울리는 게임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언젠가 또 꺼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오겠지, 하며 일단 잘 가지고 있다. 마침 숙소에는 미니 당구대와 노래방 기계도 있어서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플레이가 이어졌다. 멤버 중 몇몇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 MT가 처음이라 했다. 다들 MT가 너무 오랜만이라, 이렇게 마음껏 놀아본 게 오랜만이라며 즐거워했다. 생각해 보면 대략 3050의 직장인들이 이렇게 순수하게 놀겠다는 마음으로 뭉치는 일은 역시 흔치 않을 것 같다.


새로 시작한 일에 대한 어려움으로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돌덩이가 놓여 있었다. 결국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난 다음날 아침에 먼저 일찍 빠져나왔다. 바쁜데 괜히 시간을 뺏게 한 거 아니냐고 걱정해 주는 멤버도 있었지만 내 마음은 정 반대였다. 이렇게 더 신나게 놀 수 있는데 맘 편히 놀지도 못하게 하는 내 일이 야속할 뿐이랄까. 한 달이나 지났지만 우리는 만나면 또 그때 이야기를 하고, 또 떠나자는 이야기를 한다. 그땐 일도 좀 적응되었을 테니 괜찮겠지. 빨리 또 새로운 게임을 찾아봐야지. 모든 새로운 게 제일 재미있으니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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