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친구 따라 강남... 아니, 트레킹 하다!?

2017.3.9. 와라즈, 페루 (D +31)

by 배짱없는 베짱이

안데스 산맥. 평균 고도 4,000m. 남아메리카의 서부 해안을 따라 뻗어있는 지구 상에서 가장 긴 산맥. 리마에서 버스를 타고 7~8시간 정도 북쪽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도시인 와라즈는 바로 이 안데스 산맥에 터를 잡은, 해발 3,000m에 달하는 고산 도시로, 아름다운 안데스 산의 자연과 함께 트레킹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대체 나는 어쩌다 여기에 온 거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말 중에 하나가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이다. 왜 젊다고, 굳이 안 해도 될 고생을 사서 하라는 걸까. 그중에서도 특히 더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신체적인 고통을 수반함에도 일부러 하고야 마는 어떤 행위들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등산 같은 것.

나중에야 들은 이야기지만 “트레킹이 아니라면 왜 굳이 남미까지 왔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산이 많고 거대한 자연이 펼쳐져 있는 이 대륙은 온통 다양한 트레킹으로 유명한 곳. 그러게, 바로 그 안데스의 대륙을 향하면서도 산을 오르는 일 따위 절대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다니. 최고의 운동이란 동네 산보, 바람막이라든가 등산화 같은 장비는 물론 어떠한 몸과 마음의 준비도 없던 나인데,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이곳에 와버렸다. 트레킹의 도시 와라즈에. H, J, S 이 녀석들을 따라서 말이다.


3박 4일짜리 산타크루즈, 빙하를 보는 파스토루리 트레킹 등 와라즈에는 아주 많은 트레킹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정말 다행히도 친구들은 당일치기 69호수 트레킹만 하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나도 69호수는 (갈 생각은 없었지만) 남미로 향하기 전부터 아름다운 곳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곳이었다. 뭐 고산증세도 없는데, 힘들어도 얼마나 힘들겠어, 시작부터 몸을 사릴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트레킹에 합류했다.


왜, 가볍다고 생각했을까. 왜, 모두들 69호수 트레킹을 아름답다고만 말했던 걸까. 수많은 후기에서 들은 것 같은, 아마도 아름다웠을 그 안데스의 풍경은 트레킹을 시작한 지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찾아온 육체의 시련 앞에 산산이 무너졌다. 체력적 열세에 밀려 감탄 따위는 이미 내 마음속에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30분에 한 번, 15분에 한 번, 다시 10분에 한 번. 산을 오를수록 걸음을 멈추고 쉬어야 하는 주기가 짧아졌다. 체력은 이미 오래전에 바닥이 났다. 앞사람과 뒷사람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같은 차를 타고 이동해 온 일행 중 몇몇은 도중에 포기한 모양인지 아예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날씨도 뒤죽박죽. 비가 내리다가 해가 비치다가, 다시 비가 오다가, 비와 함께 햇빛이 내리쬐었다.

5분이나 걸었을까.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은 물도 마실 수 없을 정도다. 끝까지 갈 수 있을까? 과연 끝이 있긴 하는 걸까? 포기하고 싶다.

“이제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돼.” 이미 호수를 보고 내려오던 누군가가 말했다. 안 믿어. 뻔한 거짓말... 하지만 여기에서 포기하기엔 너무 멀리까지 와버린 것도 사실.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더, 어쨌든, 끝은 있을 테니까.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정말 영화같이, 흑백으로만 보이던 배경 속에서 아주 맑고 깨끗한 하늘색의 점이 눈에 들어왔다.


"우와아아아아아!"

어디서 그렇게 소리를 지를 힘이 생겼는지

정신없이 비명을 지르며 뛰었다. 그 점 같던 하늘빛이 갈수록 넓어지더니 그림 같은 한 폭의 호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69호수였다. 아름다운 것이 귀한 이유는 흔치 않아서라던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들키지 않으려고 해발 4,300m의 험준한 산속에 숨겨놓은 거대한 에메랄드. 이 땅이 몰래 혼자 간직하려고 숨겨놓았던 단 하나뿐인 보석. 그러니까, 지금까지도, 안데스 산맥 하면 잊히지 않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였다.

나보다 힘들어하며 포기할 것 같던 J까지 일행 모두 호수에 잘 도착했다. 언제 힘들었냐는 듯 우리는 함께 사진을 찍고, 웃고 떠들고,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다가, 또 좋아하다가, 볼수록 더 놀랍다가, 그러다 애써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부슬부슬 내리던 빗방울은 내려가는 길에 점점 굵어졌다. S는 그제야 고산 증세가 왔고, H는 발을 헛디뎌 한쪽 발을 소똥에 제대로 빠뜨리고 말았다. 생각보다 곡절 없이 트레킹을 잘 마친 것은 나였다. 숙소에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운동화까지 모두 빨래방에 맡긴 뒤 우리는 다 같이 따끈한 국물 요리를 저녁으로 먹었다. 정말 하고 싶지 않았던 트레킹이 남미의 첫 번째 기억이 될 줄이야. 그렇게 남미에서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트레킹이 마무리됐다. 혼자서라면 오지도, 절대 하지도 않았을 일. 힘들고, 춥고, 고생하고, 그리고 참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01. 너, 내 동료가 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