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3.11. 이카, 페루(D +33)
또다시 리마를 거쳐, 이제는 남쪽으로 4~5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 이카에 왔다. 이곳에서 택시로 10분이면 도착하는 ‘사막 속 오아시스’의 도시 와카치나는 현지에서도 이국적인 정취와 매력으로 인기가 많은 관광지. 우리의 원래 계획은, 이 작은 오아시스 마을에 들러 노을 녘을 배경으로 사막을 질주하는 버기 투어를 하고, 모래 언덕에 앉아 페루를 대표하는 쿠스케냐 맥주를 한잔 마시며 저 너머 해가 지는 모습을 함께 보는 것이었다.
낮 12시쯤. 이카. 버스 터미널.
현지인들에게도 관광지란 생각 때문인지 가까운 곳의 식당은 다 너무 비싼 것 같다. 오아시스를 주위로 마치 하나의 거대한 리조트처럼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와카치나는 단연 그 이상이라고들 했다. 더 저렴하고 알찬 여행을 위해 우린 머리를 굴렸고, 곧장 택시를 타는 대신 걸어서 시내로 나갔다. 현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슈퍼에서 간단한 장을 봐서 와카치나에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 많은 짐을 바리바리 다 싸들고 이 더운 동네를 걷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자리가 많은데 왜 굳이 우리 뒤에 앉아?"
결국 만족스러운 식당도 슈퍼도 찾지 못하고, 적당히 근처의 넓고 조용한 치파(CHIFA, 남미에서 정말 많이 볼 수 있는 중국집)에서 식사를 할 때였다. 넓은 홀에는 우리들 외에 아무도 없었는데, 한 커플이 들어와 굳이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그때 J가 흘러가듯 던진 그 말에 한 명이라도 아차! 했더라면.
남미를 향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주의사항 중 하나가 바로 소매치기였다. 언제 어디에서도 핸드폰과 카메라는 손에 혹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가방에 넣으라 했고, 가방도 꼭 내 시선이 닿는 곳에 두거나 품에 안고 있으라고 했다. 와라즈에서 너무 편한 시간을 보내서 긴장이 떨어졌던 걸까. 우린 아무런 경계심 없이 식탁과 의자 옆에 모든 가방을 쌓아뒀고, 식사를 마친 뒤에야 J의 배낭이 사라진 것을 알아챘다.
다행히 식당에는 CCTV가 있었다. 그러나 식당 주인은 우리를 도울 마음이 전혀 없었다. CCTV에는 J의 가방을 들고 유유히 사라지는 커플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건만 경찰을 부르지도, 화면을 확대해보지도 않았다. 우리의 성화에 마지못해 영상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 나는 J의 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왜 그 순간을 포착하지 못했을까. 남미에 오면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모두가 그렇게 말했는데. 왜 의심하지 못했을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길거리로 뛰쳐나가 사람들을 붙잡고 경찰서가 어디냐고 물었다. 손짓 발짓으로 가방이 사라졌다고 모두에게 외쳤다. 사거리 신호등 앞에 서있던 말총머리 소녀가 발걸음을 돌려 나를 직접 경찰서 앞까지 데려다줬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됐다. 바란 건 화면 속의 도둑을 잡아주는 것이었는데. 적어도 알아보려는 시도라도 해주길 바랬던 건데…. 경찰을 데리고 식당으로 돌아갔건만 역시 CCTV는 보는 둥 마는 둥. 없어진 배낭의 주인인 J를 데리고 경찰서로 가더니 차라리 고문과도 같은 심문(!?)이 시작됐다.
스페인어는 하나도 할 줄 모르는 J를 데리고 경찰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가방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옷이라면 그 옷이 몇 개인지. 잠바였는지, 바지였는지, 심지어 속옷의 개수까지. 그렇다면 개당 가격은 얼마인지. 한참을 번역기를 돌리며 물어보고 받아 적고 하더니, 또다시 반복되는 같은 질문. 어느새 5시가 훌쩍 넘었고, J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힘들어, 나 배낭 안 찾아도 돼. 그냥 돌아가서 쉬고 싶어."
작성하던 폴리스 리포트를 그만 두기로 했다. 경찰은 이제 30분, 상사에게 확인을 받고 도장만 찍으면 끝이라고 했지만 더 이상 우리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일 다시 오겠다는 빈말을 날리고 다 함께 경찰서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터미널에서 부르던 가격보다 2배는 비싸게 택시를 잡아 탔다. 이미 해는 뉘엿뉘엿, 사막에서 일몰을 보는 것은 이미 무리였다. 친구들을 굳이 경찰서까지 가게 만든 것이 오히려 미안했다. S는 기분전환을 하자며 슈퍼에서 캔맥주를 한 박스 사 왔다. 심란한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와카치나는 평화로웠고 여유와 웃음이 넘쳐흘렀다. 내 생애 처음으로 본 사막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캔맥주 한 박스를 다 비웠고, 다음날 새벽 숙취와 함께 그 유명하다는 버기차에 올랐다. 아무도 없는 사막의 질주는 정말 끝내줬다.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정말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폴리스 리포트
여행자 보험을 들어놓은 여행객이 해외에서 물건을 도난당했을 때 꼭! 작성해야 하는 문서로, 폴리스 리포트가 있어야 보험을 통해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여느 여행지에서든 비슷하겠지만, 남미에선 잃어버린 물건은 대부분 찾을 수 없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래서인지 경찰들도 여행객이 도난을 신고하면 범인을 잡거나 물건을 찾으려기 보다 그냥 이 리포트 작성에만 집중하는 듯했다. 어떤 장소, 시간, 상황에서 어느 정도 금액의 어떤 물건들을 잃어버렸는지 세세하게 물어보고 적는 것도 바로 보상 금액과 관련이 되어있기 때문.
그러나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J는 심지어 여행자 보험도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굳이 폴리스 리포트 때문이었다면, 경찰서를 가지 않았어도 되었다는 슬픈 뒷 이야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