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짱이 다이어리] 2025.10.26의 기록
10시간 쯤 뒤면 또 다시 출근할 시간이다. 사실 오늘도 사무실에 다녀왔다. 생일이라 만나기로 했던 친구가 퀭하게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고, 준비한 선물을 어떻게든 오늘 전해주고파 친구의 집이라도 들리려던 나는, 날도 궂은데 그럴 필요 없다고 다음에 보자는 친구의 이야기에 쉽게 마음을 돌렸다. 그래, 아플 땐 혼자 쉬는게 더 나을 수 있지. 실은 틈이 생겨 조금 다행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다시 집에 돌아가 친구 주려던 선물들은 집에 놓고, 빈속을 달래줄 빵쪼가리를 챙겨 사무실로 갔다.
외주로 맡긴 원고는 역시 엉망인 상태로 내 메일함에 도착해 있었고 ‘이렇게 엉망일 땐 어떻게 해요?’ 라는 질문에 ‘내가 해야지 뭐’라고 들었던 대답들을 떠올리며 열심히 자료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사실 나도 다 알고 있다. 내가 하는 것 밖에 도리가 없다는 걸.
주말 내내 친구들을 만나 있으면서도, 사무실에 앉아 이렇게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은 자꾸만 과거를 되내이고 있다. 그때 일을 다 받는게 아니었는데.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정임을 어필했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면 업무 범위에서라도 조율을 받아냈어야 하는데.
사실 실무의 종류야 조금씩 다르더라도 이런 일들은 크고 작은 업무들을 맡으며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이기에 이런 일정 조절의 실패가 나에게 너무 뼈아프게 다가온다. 이젠 이런 나의 실수를 받쳐줄 사람들이 없는데. 오로지 나의 힘만으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할텐데. 지난번처럼, 이번에도 나를 갈아넣으면, 누군가를 붙잡고 매달리면, 또 어떻게든 해결은 되겠지. 과연 이런 것도 정말 하다보면 더 익숙해질까.
정작 빠질까 고민했던 저녁 모임은 추모 모임이었다. 몇년 전 먼저 떠나보낸 진을 기억하기 위해 매년 이맘때쯔음 우리는 한 번씩 만난다. 자꾸 과거를 돌아보기보단 미래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라는 마음이 여기에도 통용될 수 있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실은 그런 얄팍한 핑계로 모임에 빠지려 했다.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어차피 이때쯤이 아니면 서로 연락할 일도 얼굴볼 일도 별로 없는 사이다.
사무실 불을 끄고 나와 버스를 타고 광화문으로 가는 길, 머릿속은 맑지가 않다. 생일날 아픈 친구를 챙겨주지 못한 것과, 제때 업무 조율을 못해 주말에 이렇게 나왔음에도 속시원히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과, 그런 나에 대한 자책같은게 뒤섞여 무거워진 생각들이 사무실 어디께에 들러붙어 나를 따라오지 못한다. 몸은 점점 광화문에 가까워 오는데 머리는 여전히 연남동과 망원동 사이 어디께를 헤매는 듯 하다.
작년까진 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오늘은 서로의 사는 이야기를 나누기 바쁘다. 그 중에는 새로운 정보도 있지만 분명 이전에 들었는데 까먹고 있던 일들도 있다. 어떤 이야길 들을 때마다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 같다가, 조금 지나고 나면 아 맞다- 싶었다가, 이내 내년에 만났을 때 내가 또 이 이야기를 기억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지금 내가 발딛고 있는 이 자리에 충실하지 못하는 일만큼 나에게도 당신들에게도 실례가 또 어디 있을까. 실은 이건 집중력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지난주 미팅에 가서 그 불가능한 일정의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마치 그 일이 내 일이 아니라는 듯 정신을 한 쪽에 빼놓고 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 이를테면 함께 옆에 앉아있는 대표가 해결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실무는 모두 나의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미팅이 끝난 뒤에야 그 현실이 인식 됐다. 내 몸이 한강을 건너던 그 때, 내 머리는 또 어디에 있던걸까.
감각을 조금 더 예민하게 벼리고 싶다. 햇빛을 쫒으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단풍의 흔들림을 보며 바람을 느끼고, 처음 가보는 동네를 조금 더 잘 기억하고, 상대방의 표정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들의 말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금 더 영민하게 파악하고 싶다.
한 박자 늦었지만 다행이 수다를 떠는 동안 머리가 내 몸을 따라잡았다. 비로소 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모르는 일년 사이 그들의 삶을 헤아려볼 노력을 한다. 내가 그렇듯, 누구나 다 꺼내보이지 못하는 그들의 세상이 있다.
진을 떠올려 본다. 내가 모르는 세상 속에서 아픔을 견뎌내고 있었던 진. 이제는 평생 그때 많이 아팠느냐고 왜 한마디 말도 없었느냐고 물을 수도 없는 진. 그 시절 너와 함께 있을 땐 나는 너에게 집중하고 있었을까. 왜 이제와서 너는 더 나에게 큰 존재가 되어버린 걸까. 너는 경험하지 못한 날들이 벌써 이만큼 흘렀다. 그 소중한 나날을 나는 또 이렇게 충실하지 못하게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