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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Aug 04. 2018

24. 삶과 죽음의 어떤 경계, 레콜레타

2017.5.25.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르헨티나(D+108)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라곤 영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이라는 영화의 배경이 거의 전부였다. 원제가 ‘측벽’인 이 영화 속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빼곡하게 들어선 특징 없는 빌딩 숲 사이로 혼자 제 발걸음 옮기기 바쁜, 소통의 구석이란 찾기 어려운 삭막한 도시였다.  




다행히도 그 영화 속 도시의 모습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첫인상은 훨씬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특징 없어 보이던 빌딩 숲은 사실 제각각 다 다른 모습으로 멋들어지게 모여있었는데, 이 도시에선 건물마다 다른 디자인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 법으로 규제되어 있다고 한다. 세트로 지어서 늘어선 건물이라도 적어도 발코니의 디자인 만이라도 다른 점이 꼭 있었으니 그런 차이를 찾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왕복 10차선이 넘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로라는 7월 9일 도로를 비롯, 도시 자체의 규모에서부터 이곳은 남미에서 내가 머물렀던 가장 크고 화려한 도시였다. 거리를 따라 넓고 예쁜 카페, 옷 가게, 빵집 등이 늘어서 있었고 그런 가게들을 1층에 둔 높은 건물들은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하루 종일 걸어 다녀도 지치지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혼자 있어도 누구도 말 걸지 않고 눈길을 주지 않아서 편한, 말 그대로 대 도시였다.  


탱고 극장을 개조해서 만들었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엘 아테네오(El Ateneo)
알록달록 아름다운 건물이 시선을 사로잡는 예술인과 탱고의 거리 라 보카(La Boca)
주말이만 열린다는 산텔모 시장의 플리마켓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 피아졸라(Piazzolla)의 탱고


오랜만에 크고 깨끗한 프랜차이즈 햄버거 집에서 햄버거 세트를 사 먹었다. 그리고 탱고 극장을 개조해서 만들었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엘 아테네오를 구경했다. 아르헨티나하면 빼놓을 수 없는 탱고 공연, 우리나라로 치면 난타와 비슷한 느낌으로 이곳에 오면 꼭 봐야 한다는 푸에르사 부르타 공연을 보고, 알록달록 아름다운 거리로 유명하지만 치안이 안 좋으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라 보카 마을도 돌아봤다. 주말엔 주말에만 열린다는 산텔모 시장을 다녀오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어쩌면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여행지 같지 않은 이곳에서 우리는 오랜만에 가장 여행자다운 모습으로 그렇게 도시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그렇게 도시를 즐기며 지나다니던 동안 유난히 인상적인 낮은 담이 있었다. 도시의 이곳저곳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늘 지나치며 보았던 그곳, 현대적이고 높은 건물들이 빼곡한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그곳의 정체는 바로 공동묘지였다.  



세멘테리오(Cementerio) 그러니까 '공동묘지'는 남미에 와서 참 이색적이었던 풍경 중 하나다. 대부분의 마을에 공동묘지들이 충분히 걸어서 보러 갈 수 있는 거리, 말 그대로 마을이라는 범위 안쪽에 조성되어 있었다. 그곳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무섭고 어두운 분위기보다는 해질 무렵이면 부모가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걷기도 하는 마치 산책로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우리네와는 꽤나 색다른 풍경일 수밖에 없어 언제부턴가 머무르는 동네의 세멘테리오를 구경 다니는 것은 괜찮은 일과 중 하나가 되곤 했는데, 산 자가 망자들을 위해 그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좋은 집을 지어주고 여전히 함께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한편으론 늘 오늘만 사는 것 같던 남미에서 만난 친구들에 대해 내 멋대로의 이해가 깊어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런 곳을 바로 가까이에 두고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니 삶도 죽음도 우리와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 아닐까 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중심에 자리 잡은 '레콜레타(Recoleta)'는 남미에서 가장 유명한 세멘테리오로 이미 널리 알려진 관광 포인트다. 레콜레타가 유명한 이유는 이곳이 특히나 '초호화 묘지'이기 때문이다. 생전의 부가 사후 안식처의 격까지 좌우한다는 거엔 여기나 거기나 다르지 않은 것 같다만, 이 도시를 오가는 수많은 관광객의 시선을 잡아 끄는 색다른 장소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오지 않는 듯한 넓은 부지에는 제 명을 다 살고 떠났을 것 같은 노인부터 나보다 짧은 생을 살고 갔을 청년, 심지어 아주 어린 아기의 것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묘가 마련되어 있다. 대통령의 부인으로 존경과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 유명한 에바 페론에서부터 각종 정치인, 학자 등 아르헨티나의 내로라하는 고인들의 묘가 모두 이곳에 있다. 마치 하나의 작은 건물처럼 지어놓은 묘는 하나하나 생긴 것도 높이도 규모도 제각각이다. 그중에는 마치 어제도 오늘도 사람들이 오고 간 듯 싱싱한 꽃다발이 놓여 있는 곳도 많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이 빼곡한 에바 페론의 묘소


아르헨티나를 향하기 전 모두가 카드 대신 달러를 준비하라고 했다. 환율이 높고 물가가 불안정하기에 달러를 챙겨가 암 환전을 하는 것이 더 낫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글을 쓰는 2018년 8월 현재 아르헨티나의 페소는 달러 당 27~28페소를 전후하는데, 내가 머물던 2017년 5월에는 달러 당 16페소 언저리였다. 1년 사이의 변화라기엔 믿을 수 없는 큰 폭이다. 아르헨티나의 대표적 여행코스인 이과수 폭포는 그때도 거의 3개월, 6개월에 한 번씩 입장권의 가격이 오르고 있었고, 동네 시장과 레스토랑의 체감 물가도 차이가 커서 이 나라에서 머문 약 한 달여의 시간 동안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것은 거의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암 환전을 시도하다가 사기를 당할 뻔한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ATM 출금보다 달러 환전이 더 낫게 먹힌 것이 사실이었다. 

사실은 그 부의 격차가 우리나라보다 더 극심한 것 같은 이곳 남미에서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호화로운 집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참 묘했다. 내가 남미에서 만난 친구들의 이곳에서의 삶은 저 사람들이 죽어 무덤까지 가져간 어떤 것들보다도 없어 보였으니까. 사는 건 뭐고, 죽는 건 뭘까. 보통의 세멘테리오를 보면, 온갖 개성을 뽐내는 단독 주택이 모여 있는 듯한 중심가와 달리 가장자리에는 낡아 쓰러져가는 임대 아파트 느낌의 겨우 관만 들어갈 수 있을 공간이 벽을 따라 빼곡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 임대 아파트 같은 안치소에 들어가 있는 관 중엔 관리도 되지 않는 듯 낡고 허물어가는 것들이 부지기수다. 물론 그 조차의 공간도 얻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다.  



가까이 있다는 것은 늘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서로를 더 생각하고 자주 돌아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 언급했던 영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의 남녀 주인공은 마침내 구멍을 뚫는 것이 금지되어 있던 측벽에 창문을 냄으로써 소통을 하게 된다. 아무리 가까워도 벽이 막고 있는 한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 수 없다. 작년에 개봉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코코>에서도 다르지만 비슷한 종류의 메시지를 던진다. 모두에게 잊히는 순간이야 말로, 진짜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라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도 레콜레타 지역은 가장 격조 높은 지역 중 하나라고 한다. 주위로는 여전히 온통 높고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들이 빼곡했다. 그 사이 담 하나를 두고 나누어진 죽은 자와 산 자의 공간. 모두가 볼 수 있는 장소에 절대 잊히지 못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은 사람들. 죽음을 터부시 하지 않는 듯한 그 모습이 좋아서 좋았던 세멘테리오였는데 어느새 그곳에 조차 함께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는 걸 알아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아름다워서 어디 말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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